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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명인 김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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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노재명·조성환 공저 『피리 거장 김준현 명인 탄생 100주년 기념 ‘제1회 세종국제실크로드음악제’ 한국 피리·아르메니아 두둑의 만남, 피리와 실크로드』 서적(서울:채륜, 2018년, 부록 CD '피리 거장 김준현 명인 추모 음반’ 내장) 23~44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피리 명인 김준현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가농(笳濃) 김준현(金俊鉉, 본관:경주)은 1918년 4월 10일(음력 2월 29일)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화방리에서 태어나 1961년 9월 30일(음력 8월 21일)에 별세하였다.(김기수 저서 『국악 입문』 서울:한국고전음악출판사, 1972년, 343쪽)
  전동면 화방리라는 지명은 현재 공식 행정 구역상 존재하지 않는데 오늘날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현지에 살고 있는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이 다방리가 예전에는 연기군 전동면 화방리로 분류되어 명명된 적이 있다고 한다.
  다방리가 김준현 출생지가 맞다면 다방리에 있는 천년 사찰 비암사와 김준현 가문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절에서 예로부터 각종 불교의식을 행할 때 김준현과 그 일가가 음악을 담당했거나 음악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준현이 태어난 충남 연기는 국악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중고제 판소리 명창 백점택, 가야금 명인 박상근이 연기 태생이다. 이러한 명인들이 연기에서 출생하고 활동한 점도 거장 김준현의 탄생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연기의 백씨, 박씨 국악 가문과 김준현 가문이 혈연 또는 국악 사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김준현의 피리 소리는 마치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그의 피리 소리는 청량하면서도 우렁차고 노래 반주를 할 때면 피리 악기가 같이 노래를 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즉흥성이 강한 연주를 하였으며 여러 악기 합주곡 <평조회상>을 피리 악기 하나로 훌륭히 소화한 최초의 음악가이다. 정악 합주를 주도하는 목피리(수석 피리)의 대가였다.
  김준현은 정악 계통 출신 연주자지만 정악에만 구속되지 않고 민속악과도 격 없이 교류하였는데 이러한 면모는 그에게 관악기 연주에 있어서 많은 가르침을 준 대금 명인 김계선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늘날 정악과 민속악 사이에 큰 장벽이 놓여져 있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인데 김준현 스승 김계선 또한 정악 계통 출신 연주자지만 민속악 연주 활동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약하였다. 김준현은 정악 연주뿐 아니라 민속기악, 가사, 시조, 민요 등에도 능했다.
  김준현은 1958년 12월 국악진흥회로부터 제3회 국악상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1959년 2월 10일자 『동아일보』에 김준현이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이는 김준현이 집필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누군가 김준현을 인터뷰하고 대신 작성 정리한 글인 것으로 보인다. 원문 그대로 아래에 옮겼는데 띄어쓰기는 일부 조절하고 한자는 한글로 바꾸고 한글 옆 괄호 안에 넣어 정리하였다.

  “천자예담(千字藝談) - 일관(一管) 피리의 보람 김준현(金俊鉉)(국악인 國樂人)
  어언 이십구년(二十九年)이나 된다. 충남(忠南) 연기군(燕岐郡) 전동면(全東面) 화방리(華芳里)에서 전의국민학교(全義國民學校)를 졸업(卒業)한 약관(弱冠) 십사세(十四歲)의 소년(少年)인 나는 급(笈)을 부(負)하고 상경(上京)하여 당시(當時)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 제사기생(第四期生)으로 응모(應募)하여 무난합격(無難合格)이 되었다.
  내가 아악부(雅樂部)를 지원(志願)한 데는 그만한 이유(理由)가 있었던 것이니 나의 외숙(外叔)께서 그때 아악사장(雅樂師長)으로 아악부(雅樂部)를 주재(主宰)하고 계셨기 때문에 이곳을 택(擇)하게 된 것이다.
  나의 외숙(外叔)은 곧 김영제(金寗濟) 선생(先生)으로 호(號)를 괴정(槐庭), 제사세(第四世) 아악사장(雅樂師長)이오 악원(樂院)의 세가(勢家)이기도 하였다.
  제일세(第一世) 국악사장(國樂師長)인 김종남(金宗南) 선생(先生)은 바로 나의 외숙(外叔)의 양조부(養祖父)가 되시고 김종남(金宗南) 선생(先生)의 계씨(季氏)요 가야금(伽倻琴)의 명수(名手)일 뿐 아니라 덕행(德行)과 지조(志操)도 저문(著聞)하던 김종표(金宗杓) 선생(先生)은 또 그의 생정조부(生庭祖父)이었다.
  김영제(金寗濟) 선생(先生)은 이런 가문(家門)의 후예(後裔)로 가야금(伽倻琴)이 전공(專攻)이셨고 더욱 악리(樂理)에 효통(暁通)하셨는데 현행(現行)의 관악보(管樂譜)는 모두 이분의 손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수(數) 많은 지원자(志願者) 중(中)에서 내가 선발(選拔)된 것이 지금도 혹에 외숙(外叔)의 덕(德)이던가 혹은 나의 실력(實力)의 소치(所致)인가를 나는 잘 모른다.
  전공(專攻) 악기(樂器)는 피리로서 최순영(崔淳永) 선생(先生)의 훈도(薰陶)를 받았다. 그러나 나를 오늘 있게 각별(恪別)한 지도(指導)를 아끼지 않은 분이 있으니 전공(專攻)은 다르나 김계선(金桂善) 선생(先生)이 그이다. 김계선(金桂善) 선생(先生)의 호(號)는 죽농(竹濃), 대금(大琴)의 제일인자(第一人者)로 근년(近年) 대금(大琴)으로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명인(名人)이었다.
  졸업(卒業) 후 나는 매일 이분에게서 한두 시간(時間) 특별(特別) 지도(指導)를 받았는데 이 동안의 공부가 지금토록 보람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남에 장(長)한 것이 있다면 나의 기예를 내가 조금도 인(吝)색치 않았다는 자랑일 것이다.
  이 걸음 걷고 걸어 성급(性急)히 마라
  아무런 천재(天才)라도 훈련에 있다...
  가람 이병기(李秉岐) 선생(先生) 지으신 국악사양성소(國樂士養成所) 소가(所歌)의 한 구(句)어니와 나는 어느 때 어느 자리를 가리지 않고 나의 피리를 원(願)하는 자리는 별(別)로 사양(辭讓)해본 예(例)가 없다.
  다독다작(多讀多作)이 속문(屬文)의 요체(要諦)라고 들지만 연주가(演奏家) 역시(亦是) 다작(多作)히 많이 불고 치는 외(外)에 비결(秘訣)은 없다고 나는 감(敢)히 말한다.
  지난 십이월(十二月) 국악진흥회(國樂振興會)로부터 제삼회(第三回) 국악상(國樂賞)이 수여(授與)되었다. 일관(一管) 피리로의 적년(積年)이 불고(不孤)한 일에 나는 감루(感淚)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준현이 전의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는데 김준현이 태어난 곳과 전의초등학교는 거리가 먼 관계로 김준현이 전의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는 해당 학교가 위치한 전의면 읍내리 또는 근방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옛 충청도 남성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김준현은 평소 말이 별반 없었다고 한다. 예용해는 그런 김준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피리 김준현(金俊鉉) 그는 말이 없다. 말이 없다가도 피리(觱篥)를 잡으면 청산유수(靑山流水) 표표(飄飄)한 가락은 가없는 허공(虛空)을 불러 가슴 속 깊은 회포(懷抱)를 뇌어 천언만어(千言萬語)한다.
  가냘픈 일관(一管)의 피리는 손때가 올라 윤(潤)이 난다. 뚫린 구멍에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마음에 흔은히 젖어드는 비율(悲律), 어느덧 피리는 따스론 입김이 서리어 체온(體溫)에 통(通)한다. 내가 없고 피리가 없다. 온누리에 있는 이 피리의 구성진 가락뿐, 피리를 들어 당대(當代) 제일(第一)의 가농(笳濃) 김준현(金俊鉉 43歲) 씨(氏)가 즐겨 부는 평조회상(平調會相)의 말하듯 구슬픈 가락을 들어 눈물 짓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김씨(金氏)는 충남(忠南) 연기군(燕岐郡) 전동면(全東面) 화방리(華芳里)에서 태어났다. 전의국민학교(全義國民學校)를 마치고 상경(上京)한 것이 십사세(十四歲), 당시(當時) 외숙(外叔)인 괴정(槐庭) 김영제(金寗濟) 씨(氏)가 제사대(第四代) 아악사장(雅樂師長)으로 있는 아악부양성소(雅樂部養成所) 제사기생(第四期生)으로 입소(入所), 월(月) 십오원(十五圓)의 관비(官費)를 지급(支給)받고 소정(所定)의 오년간(五年間)을 수업(修業)했다.
  첫 이년간(二年間)은 악기(樂器) 전반(全般)에 걸쳐 배우고 나머지 삼년(三年)은 피리를 전공(專攻)했다. 본격적(本格的)인 피리 공부(工夫)는 이조말(李朝末) 아악(雅樂)의 정통(正統)을 이어받은 최순영(崔淳永) 선생(先生)의 훈도(薰陶)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아악(雅樂) 일념(一念)에 살아온 이 칠십(七十) 노옹(老翁)은 손을 잡듯 피리의 비곡(秘曲)을 전수(傳授)하기에 애정(愛情)을 쏟았다. 이외 아악부(雅樂部) 선배(先輩)인 이용진(李龍振) 씨(氏)로부터도 피리의 기법(技法)을 배우고, 악곡(樂曲)은 근세(近世) 젓대(大笒)의 명인(名人) 죽농(竹濃) 김계선(金桂善) 씨(氏)의 지도(指導)를 받았다. 젓대와 피리는 악기(樂器)가 다르니 만큼 표현(表現) 방법(方法)이 달라 악곡(樂曲)은 구음(口音)으로 배웠다. 죽농노(竹濃老)의 높은 예술적(藝術的)인 경지(境地)에 사숙(私淑)하여 후일(後日) 김씨(金氏)가 가농(笳濃)으로 자호(自號)하게 된 것도 죽농(竹濃)의 경지(境地)에 더(加)한 자기(自己)의 예술(藝術)의 세계(世界)를 이룩하려는 염원(念願)에서였다.
  김씨(金氏)는 가람 이병기(李秉岐) 씨(氏)가 작사(作詞)한 양성소가(養成所歌)의 일절(一節)인
  이 걸음 걷고 걸어 성급(性急)히 말라
  아무런 천재(天才)라도 훈련(訓鍊)에 있다...
를 좌우명(座右銘)으로 정진(精進), 피리는 날로 다듬어져 갔다. 그러나 김씨(金氏)는 “피리를 택(擇)하게 된 것은 나 자신(自身)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스승들이 내가 피리의 특출(特出)한 재질(才質)을 가진 것으로 인정(認定)했던 것 같지도 않다”고 회상(回想)한다. 하다가 보니 되었다는 투다.
  반면(反面) 그의 주위(周圍)에서는 ‘피리는 단조(單調)로운 악기(樂器)이니 만큼 유현(幽玄)한 그 악성(樂聲) 표출(表出)은 자재(自在)로운 것으로,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득(自得)해야 한다. 따라서 피리 만큼 천부(天賦)의 음악성(音樂性)을 필요(必要)로 하는 악기(樂器)도 드물다’고 하며 김씨(金氏)의 타고난 천성(天性)을 이르는 사람도 있고, 전기(前記)한 외숙(外叔)이 제사대(第四代) 아악사장(雅樂師長)인 괴정(槐庭) 김영제(金寗濟) 씨(氏)일 뿐만 아니라 그 양조부(養祖父)가 제일세(第一世) 국악사장(國樂師長)인 김종남(金宗南) 씨(氏)이며, 그 계씨(季氏) 되는 가얏고의 명수(名手) 김종표(金宗杓) 씨(氏)가 김씨(金氏)의 생정조부(生庭祖父)로 악원(樂院)의 세가(勢家)에서 낳았다는 혈통(血統)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제나 입에서 피리를 떼는 일이 없는 그의 꾸준한 정진(精進)이 오늘을 이루게 했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합주(合奏)에서는 피리가 주선율(主旋律)을 맡아 교향악(交響樂)의 ‘퍼스트 바이얼린’ 구실을 한다. 따라서 목피리의 든든하고 든든하지 못한 것으로 아악(雅樂) 합주(合奏)의 되고 안되고의 가름이 되는 것이다.
  김씨(金氏)가 목피리를 잡는 날이면 엉성하던 합주(合奏)도 저절로 오밀조밀하게 얼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 김씨(金氏)가 피리를 잡은지 삼십년(三十年), 줄곧 반려(伴侶)로 삼아 온 피리는 지금도 자그마한 오동(梧桐)나무 상자(箱子)에 간직되어 있다. 그 오동(梧桐) 상자(箱子)는 손때로 곱게 길이 들어 칠(漆)을 올린 것 같다.
  상자(箱子) 속은 진보라색(色) 융이 깔렸고, 그 속에 피리는 신주(神主) 모시듯 간직되어 있다. 어느 선배(先輩)로부터 물려받았다는 피리는 오랜 손때에 전 채 금이 갔고, 금이 간 언저리를 동여맨 명주실도 다 해지려 하고 있다. 암만 낡고 해졌을망정 그만한 소리를 지닌 피리를 만날 수가 없어 아낀다는 것이다.
  김씨(金氏)는 지난 날이 그러했듯 남은 앞날도 피리 속에 묻히리라 한다. 이토록 피리를 삶의 전부(全部)요, 다시 없는 보람으로 삼았건만 김씨(金氏)는 아무 자리에서나 피리를 사양(辭讓)하는 법(法)이 없다. 위로는 복두(幞頭), 홍단령(紅團令), 남사대(藍絲帶), 목화(木靴)로 정장(正裝)한 어전주악(御前奏樂)에서부터 아래로는 궁항(窮巷)의 야노(野老)가 청(請)하는 가락에 이르기까지 마다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있다면 ‘좀 더!’ 하는 의욕(意慾)뿐이라고 한다.
  완성(完成)에 가까운 자기(自己) 예술(藝術)에서 방황(彷徨)하는 자족(自足)보다도 겸허(謙虛)한 의욕(意慾)에 살기를 원(願)하고 있는 것이다.”(예용해 저 『인간문화재』 서울:어문각, 1960년 작성, 1963년 발행, 39~42쪽)

  상기 기록에 언급되어 있는 김준현이 생전에 연주하고 소중히 지녔던 피리는 김준현 사후 행방을 알 길이 없게 되었다. 혹시 김준현 후손이 그 피리를 보관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김준현의 아들이 국악사양성소 12기로 입소하여 국악을 배우다가 중퇴한 바 있으니 어쩌면 김준현 피리를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위의 두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김영제는 김준현의 외숙으로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제4대 아악사장(雅樂師長)이었고 제1대 국악사장(國樂師長)인 김종남(헌종 때 음악가 김창록의 아들)은 김영제의 양조부(養祖父)이며 김종남의 아우 김종표는 가야금 명인이다. 이 기록이 후에 와전되어 김영제가 김준현의 외조부라고 잘못 기록된 책도 있고 김준현이 김종남의 손자라고 잘못 기록된 책도 나온 적이 있다.
  1980년 1월 21일자 『경향신문』 ‘젊은 국악인들 해경악회 발족’ 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활기를 찾고 있는 국악계에 해경악회란 새로운 단체가 발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악회의 구성원은 지난날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원로 악사와 그 맥을 잇고 있는 국악고등학교 졸업생 등으로 모두 1백여명. 이로써 국악계는 정농악회, 대악회, 신국악회 등과 더불어 각각 개성있는 활동을 폄으로써 국악의 폭을 더욱 넓힐 수 있게 됐다.
  이 악회의 발족은 지난해 11월 최충웅(국립국악원장), 박영안(시립국악관현악단 악장), 김선한, 조운조(이상 이대 교수), 이강수(교련 홍보실), 이상용(국악고교) 등 젊은 국악인들이 모여 국악이 처한 시대적 소명을 다하자는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사실 해경악회는 전에도 있었던 단체 이름으로 같은 명칭을 사용한 점으로 본다면 발족보다는 재발기라는 표현이 옳다.
  지난 1945년 당시 이왕직아악부에 있던 봉해룡·김성진·(고)김준현·김천흥·김태섭 등은 이 이름의 악회를 조직, 서로 친목을 도모했었다. 함께 팀을 구성, KBS 전신인 당시 경성방송국 등에 출연했으며 51년에서 53년까지 부산 피난 시절과 환도 후에도 감상회 등을 개최하면서 활기를 더했다. 그러다가 회원들이 작고하고 현역을 떠나는 사람이 속출함으로써 이 회는 유야무야 해체됐었다.
  그것을 이왕직아악부의 전통을 이어온 국악고교 출신의 젊은 국악인들이 재정비,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것이다.”

  김준현은 1936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졸업 후 아악수(雅樂手)로 아악부에 9년간 근무하였고 1944년 12월 이화동회(梨花洞會)에 촉탁으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김준현은 1936~1943년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피리 연주 방송을 하였고 1936년 9월 3일 이습회(肄習會)의 제47회 공연 때 <경풍년> 합주에 참여한 이후 1943년 9월 2일 이습회의 제131회 공연시 <여민락> 6장 합주와 <절화>, <타령> 독주까지 이습회 공연에 꾸준히 출연하였다. 김준현은 오랫동안 해경악회 대표로 활동하였고 김준현 후로는 김성진이 해경악회 대표를 맡았다.
  김준현은 1947년 12월 문교부 편수국의 장사훈과 서울중앙방송국의 이혜구, 이계원, 이덕근, 송영호의 도움으로 구왕궁아악부원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전속조선음악회(專屬朝鮮音樂會) 소속으로 김성진, 김보남, 김영윤 등과 함께 방송 활동을 하였다.(송방송 저서 『한겨레음악대사전』 경기 파주:보고사, 2012년)
  김준현은 1948년 12월 27~28일 시공관에서 열린 문화인궐기대회에 김보남, 김성진, 김소희, 김연수, 김영제, 김용승, 김태섭, 박귀희, 박동실, 박록주, 박상근, 박석기, 박헌봉, 백운선, 성경린, 원우전, 이동백, 이혜구, 임유앵, 임춘앵, 장사훈, 한산월, 한영숙, 홍원기 등 문화예술인 500여명과 함께 초청되었다.(1948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1949년 8월 2일 김준현은 라디오(HLKA)에 출연하여 피리 독주로 <경풍년>을 방송하였다.(1949년 8월 2일자 『경향신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는데 전쟁나서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김준현, 김성진, 김보남, 김태섭, 성경린이 비원 앞에 땅을 파고 경(磬), 종(鐘) 같은 국악기를 다 묻고 피난을 갔다 한다.(이주환 증언)
  1951년 4월 9일 부산에서 이주환이 국립국악원 초대 원장으로 임명됐을 때 김준현은 이병성, 김만흥, 박영복, 김보남, 김영윤, 김기수, 김성진, 이덕환, 홍원기, 김상기, 김태섭, 이창배와 함께 예술사(藝術士)로 임명되었고 1951~1961년 국립국악원 장악과 예술사·국악사로 활동하였다.
  1955년 3월 14일 김준현은 서울방송국(KA) 라디오에 출연하여 피리 독주로 <유초신지곡>을 방송하였다.(1955년 3월 14일자 『동아일보』)
  1955년 8월 10일 김준현은 서울방송국(KA) 라디오 ‘국악 해설 – 육화대’(해설:성경린)에 출연하여 연주(피리 추정) 방송하였다.(1955년 8월 10일자 『동아일보』)
  1956년 5월 25일 서울방송국에 김준현(피리), 김성진(대금)이 출연하여 <표정만방지곡>을 방송하였다.(1956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
  1957년 6월 13일 김준현은 라디오(HLKA)에 출연하여 피리 독주를 방송하였다.(1957년 6월 13일자 『경향신문』)
  1979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 ‘국악에 산다(7) 피리와 태평소의 정재국 씨’ 기사에 의하면 정재국은 1956년 현재의 국립국악중고교 전신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2기생으로 들어가면서 피리를 익히기 시작했고 당시 스승은 김준현, 김태섭 등이었다고 한다.
  김준현은 국악사양성소 3기생까지 가르쳤다. 국악사양성소에서 김준현은 피리 전공자들을 지도했고 김태섭은 일반 악과를 통해 학생 전체에게 피리를 가르쳤다. 국악사양성소의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전공은 각각 6명씩이었고 모두 남학생이었다. 김준현은 당시 워낙 유명한 연주가라 공연, 방송 등으로 분주하여 학생 지도에 시간을 할애하기가 어려워 수업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2013년 정재국 증언)
  국악학자 이혜구(전 서울대 음대학장) 글 ‘노교수와 캠퍼스와 학생 - 고심한 국악 실기 지도’(1974년 5월 8일자 『경향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국악과가 창설된 해(1959년 서울대 설립) 실기 선생 사정은 다행히 학생난보다 비교적 수월하였다. 첫해에는 거문고·가얏고·단소·피리의 실기를 46명의 학생에게 한명씩 한시간 가르치는 그런 개인지도가 아니고, 대개 12명으로 구성된 한 반을 1주 3시간 가르치는 반 지도이었기 때문에 실기 선생은 4명으로 족하였고 그 이상의 수를 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거문고는 당시 덕성여대 부교수 장사훈 씨가 맡았고 가얏고 선생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의 황병기 씨, 피리는 국립국악원 악사 고 김준현 씨가 맡았다가 그가 고인이 되자 그 이듬해에 역시 국악원의 악사인 김태섭 씨에 의하여 후계되었다. 그리고 단소는 국악원 악사장 김기수 씨가 맡아서 별 문제가 없었다.”

  1961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61년의 백서 – 국악’ 기사에 1961년 이 해에는 애석하게도 국악계의 지보인 임방울, 김준현 양씨를 아울러 잃은 손실과 비통이 있었고 이 둘은 모두 모지(某紙)에 인간문화재로 소개된 바 있거니와 국악계는 물론 한국이 자랑할 인간 국보들이었다고 성경린이 기록하였다. 그러면서 ‘왕조 아악의 자랑스런 악인으로서 피리를 불어 당대 독보이던 가농 김준현 씨’라고 성경린은 그 글에 적었다.
  ‘한국의 전통음악(6) 병주·독주’ 카세트테입(기획·녹음 제공:국악보급진흥회, 제조:대도레코드사, 공급:세화음악사, 제품번호 없음, 1MC 초판, 1985년 제작) 별책 부록 『한국의 전통음악』(김호성·이강근 엮음, 서울:국악보급진흥회, 1985년 초판) 47쪽 피리·대금 병주 <상령산>(연주:김준현·김성진) 1959년 국립국악원 녹음 관련 해설 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유초신지곡 첫곡 상령산을 향피리(김준현), 대금(김성진)의 두 관악기로 연주한 것으로 두 연주자는 당대 최고의 명인으로 이왕직아악부 4기 동기생이다. 불행이도 피리의 신(神)으로 불리우던 김준현씨는 43세에 타계.”

  정가 명창 김호성의 증언에 따르면 김준현은 국악사양성소에서 피리를 가르쳤고 국악사양성소에서 학생들이 통나무 같은 피리서를 김준현 명인에게 갈아 달라고 하면 운동장 중간 수돗가에서 숫돌로 피리서를 갈아 음양을 고르느라 소리를 내면 귀가 번쩍할 만큼 소리가 좋아 그 곳만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정재국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김준현) 선생님께서는 늘 교실 옆에 있던 야외 수도에서 피리를 다듬은 후에 독특한 다스름 가락을 연습 삼아 부시곤 했으며 그 피리 소리가 온 국악원을 휘감아 돌곤 했는데 나는 그만 선생님의 우람차면서도 유연한 피리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던 것이다. 지금도 선생님을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느니- 나니라- 니로랜띠- 시레로 나래라…’ 교정에 울려 퍼지던 선생님의 다스름 가락이다.”(정재국, ‘정악 피리의 연주는 새벽에 우는 황계 울음 소리의 성음을 닮아야 한다고 일러 주시던 나의 스승 김준현’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서울:국립국악원, 1991년, 88쪽)

  “피리를 허게 된 연유는 그때 당시에 이제 그… 가농 김준현 선생이라고 나의 스승이 있거든요. 그 분이 이제 리드는, 리드를 깎는단 말이야 (깎는 시늉을 하시며) 이렇게 응? 칼로다 이렇게 깎어서 부는 거거든. 그 분이 항상 나와서 그냥 우리 수업하고 있으면 밖에 그 수돗간에, 세면대에 와서 그냥 갈고, 그걸 부시구 그래 거기서. 그러니까 그냥 실내에서 다 들려 그게. 선생님 부시는 게 가락이. 다스름, 피리 〈다스름〉 가락을 그냥 ‘누너 나니라 니로 렌띠’ 그게 지금도 생각나. 그 가락두 그렇구, 선생님 그 소리가 생생히 지금도 들려. 그걸 너무 좋게 들어가지구 ‘아! 저게 참 굉장한 악기구나.’ 소리두 크구, 시원시원하구. 그래서 피리를 내가 할라구 맘 먹었지. 선생님 그 성음을 듣구서. 연습하시는 걸 보고. 그래서 이제 피리에… 2학년 2학기 때.”(『국립국악원 구술 총서-정재국』 서울:국립국악원, 2014년 12월, 26쪽)

  김호성의 말에 의하면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단아한 2층짜리 집에 살았다. 김준현은 1미터 59센티 정도밖에 안되는 체구에 피리 음량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콰아아아악 쏟아지는 것 같이 우람하고 테크니컬한 피리 연주를 했으며 서를 입에다 대고 씹어서 부는 피리 연주의 천재였고 사람이 하는 연주가 아니라 느껴지게 잘했으며 다시는 그런 연주를 들어보기 어려울 것 같다고 김호성은 말한다.
  김준현은 임춘앵 국극단의 일본 순회 공연 악사로 참여했는데 기후와 음식이 맞지 않아 심장병이 재발하여 귀국한 즉시 입원을 하게 되었다. 한동안의 치료로 병이 호전되어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동기 김성진, 김기수의 술자리에 동석하고 시간적으로 무리하고 권하는 술 한두 잔에 병이 재발하여 그 뒤 끝내 병상에서 회생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고 김호성은 회고한다.(2010년, 2013년, 2017년 김호성 증언) 이에 대해 정재국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음악적 욕심이 과민하여 무대 출연을 마다하지 않고 가지 않아도 될 일본 공연을 다녀오신 것이 병을 얻게 된 동기라 한다. 즉, 선생님께서는 임춘앵 창극단의 반주단 일원으로 일본에 가셨는데 그 곳의 과다한 일정에 피로가 쌓여 심장병과 고혈압을 얻었고 병고에 시달리시다가 1961년 만리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내가 국악사양성소 고등부 3학년 되던 해의 일이다.”(정재국, ‘정악 피리의 연주는 새벽에 우는 황계 울음 소리의 성음을 닮아야 한다고 일러 주시던 나의 스승 김준현’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서울:국립국악원, 1991년, 88~89쪽)

  일설에는 해금, 피리, 태평소 민속악 명인 지영희가 김준현한테 피리를 사사한 바 있다고 하지만 지영희가 김준현보다 9세 연상이고 연주법이 사뭇 다르므로 낭설로 판단된다.
  국악학자 권오성의 회고에 의하면 피리를 연주할 때의 김준현 얼굴 표정이 열정적이어서 그 표정만 봐도 피리 소리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고 양쪽 볼살을 풍선 같이 크게 부풀려 피리를 연주했다고 한다.(2018년 3월 1일 이미시문화서원에서 권오성 증언)
  권오성은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서울 운니동 국립국악원에 들려 국악 공연을 감상하곤 했는데 그때 김준현의 피리 연주 <상령산>, <염양춘>을 종종 들을 수 있었고 당시 김준현이 방송에 출연하면 지금 물가로 30만원 정도의 출연료를 받았다 한다.
  김준현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피리 연주자 이희명(국악사양성소 2기, KBS국악관현악단 악장 역임 후 작고) 등 국악사양성소 출신 10여명이 서울대학교 국악과 2기로 입학했는데 이들은 아리랑가무단을 조직하여 미국 순회 공연을 갔다 상당수가 미국에 남아 그곳에서 살며 활동하였다.(2018년 3월 12일 동북아음악연구소에서 권오성 증언)
  국악사양성소 1기 출신의 가야금 명인 최충웅의 증언에 따르면 국악사양성소에서 김준현은 피리 사범인데 장악과, 교무실에 머물 새가 없이 서무를 많이 담당하여 서무과에 많이 있었다고 한다.(2012년 최충웅 증언)
  정재국은 스승 김준현 명인의 가르침과 피리 연주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정재국, ‘정악 피리의 연주는 새벽에 우는 황계 울음 소리의 성음을 닮아야 한다고 일러 주시던 나의 스승 김준현’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서울:국립국악원, 1991년, 89쪽)

  “(김준현) 선생님께 피리를 배우던 국악사양성소 시절 선생님께서는 1기생 선배들 보다도 우리 2기생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푸셨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 학년의 피리 전공 6명은 첫 번째의 전공 시험에서 3명씩이나 90점 이상의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선생께서는 고등부 1학년 때에 벌써 난해한 <평조회상> 피리 독주곡을 가르쳐 주셨고 한편으로는 당시 국악원에서 금기시 여기던 무용반주 음악인 <굿거리>, <허튼가락>까지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전공 시험이 끝난 후에는 한사람 한사람씩 불러 연주의 장단점을 지적해 주시면서 피리 연주란 무엇보다도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있는 연주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덧붙여 주시곤 했다. 또 ‘정악 연주는 새벽에 우는 황계(黃鷄) 수탉의 울음 소리 같이 꿋꿋하면서도 시원스러우며 거친 듯하면서도 우람한 성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을 몇 번씩 반복하셔서 나는 지금도 피리를 잡을 때마다 선생님의 말씀과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또 선생님은 어떤 공연 무대도 무섭지 않은데 방송국 마이크가 제일 무섭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지만 오늘날 선생님께서 남기신 연주 녹음을 들을라치면 이미 50줄에 들어선 내 연주가 한없이 부끄럽게 여겨지니 선생님의 연주는 무대에서나 녹음기 앞에서나 두루 빼어났다고 생각한다. <평조회상>의 청청하면서도 유연한 가락에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담고, 강유(强柔)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면서 음을 풀었다가 맺었다가 하는 그 피리 소리의 멋과 맛은 가히 신기(神技)에 가까워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혹자는 선생님의 이같은 연주를 두고 곡의 해석을 너무 난해하게 하여 정악 연주가 갖는 간결미를 많이 상실케 하였다고도 비평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원가락만을 고집하고서는 시대 변화에 따른 표현력 창조에 한계를 지닌다고 보며 매 시대마다 훌륭한 음악가들이 있어 새로운 음악을 창출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전해줌으로써 음악 예술의 자연스런 흐름이 형성되는 것이라 여겨지므로 선생님의 예술세계에 대하여 언제나 흠모할 따름이다.”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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