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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노재명 편저 『중고제 판소리 흔적을 찾아서』 서적(서울:도서출판 채륜, 2012년) 333~336쪽에 실린 글의 초고이다.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1930년 무렵 판소리 명창 유공렬 모습.
동편제 판소리 거장 유공렬 명창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1928년 신문기사에 의하면 유공렬은 정춘풍의 수제자로서 명창이 사람 대접을 못받는 것에 상심하여 1898년 무렵 음악계를 떠나 고향인 충남 홍성군 고도면 가곡리에 은거하여 독공하다가 칠순이 된 1928년 30년만에 명고수 한성준의 권유로 나타나 소리 활동을 했으며 대원군과 고종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유공렬이 부르는 가사는 모두가 원문에 충실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황홀케 하며 그의 목청은 특유한 느낌이 있어 듣는 이의 흥을 돋운다고 하였다.(1928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 “삼십여년 숨어있던 명창 유공렬씨 입성”)
이 신문기사에는 유공렬이 조선축음기상회(일본축음기상회, 콜럼비아 상표)와 관계 중인 것으로 보도되었는데 1931년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발간한 『정선조선가요집』에 판소리 명창 유공렬의 사진이 실려있다.
『정선 조선가요집』에 사진이 실려있는 명인 명창들은 거의 대부분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낸 음반이 발견됐으나 유공렬의 음반만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의 음반은 콜럼비아에서 적반으로 제작한 이글레코드(일축조선소리판) 중에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공렬 명창에 대해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 175~183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유공렬(柳公烈) - 동편
유공렬은 거금(距今) 77년 전에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재질은 나이 겨우 8,9세에 가요에 능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한다. 14,15세 경에 당시 국창으로 명성이 높은 박만순 문장에 이르러 수년간 도야를 받아서 판소리에 대한 향방을 알았다.
그 후는 독공으로 계속하다가 운봉 남원간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4,5년간 정마정탁하였다. 30세경에 전주 대사습장에서 기량을 발휘하여 비로소 세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도성, 송만갑 등과 동배로서 김세종, 이날치, 정창업 등 선배들과 추종하여 실제적 견문을 확충하였다.
이리하여 소리는 원숙하여지고 명성은 원근에 쟁쟁하였다. 40세 전후하여 경성에 올라와서 원각사 광무대 당년에 김창환, 송만갑과 병견하여 더욱 명성은 일세에 높아졌다. 이리하여 고순(高純) 양대를 통하여 최근까지 울린 명창이다.
고향에서 한산한 생애를 보내다가 10여 년 전에 병사하였다 한다. 그는 춘향가와 심청가에 장하였고 춘향가 중 이별가에 특장하였다 한다. 이제 그 더늠으로 이별가 중 일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춘향과 이도령이 이리 농정하여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질길(즐길) 대로 질기고(즐기고) 놀 대로 놀 쩍에(적에) 유파 같은 광음이 추월춘풍 벌써 일년이 지내었고나. ...(중략)... 살려두고는 못 가느니. 도련님 대강이가 둘 돋혔오(돋쳤소). 애구 무서워라, 이 쇠띙띙아 하고 도련님께로 와락 달려들어 다리를 꼬집고 팔을 물어 뜯는다.”
1928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에는 1928년 당시 유공렬이 칠순이라 하였으므로 1859년 출생했다고 하겠다. 『조선창극사』(1940년 발행)에서는 77년 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를 계산해 보면 유공렬이 1863년에 출생한 것이 된다.
1928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에는 유공렬의 고향이 충청남도 홍성군 고도면 가곡리라고 되어 있고 『조선창극사』에는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출생했다고 기록되었다.
두가지 기록 중에서 유공렬 사후 10여년이 지나서 작성된 『조선창극사』 글보다는 유공렬 생존시 『매일신보』 보도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조선창극사』 기록에 의하면 유공렬은 1930년경에 별세했다 한다.
유공렬 명창의 판소리 독창회가 1928년 3월 9일 조선극장에서 열렸는데 당시 가야금 명인 심상건, 판소리 명창 강남중, 정가·민요·판소리 명창 박월정이 찬조 출연을 하였다.(1928년 3월 6일자 『매일신보』, 1928년 3월 7일자 『동아일보』)
1928년 3월 11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그 유공렬 공연은 대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1928년 3월 6·9·11일자 『매일신보』에는 이 공연을 소개하면서 유공렬이 당대 유일의 정춘풍제 명창이라고 강조하였다.
1928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유공렬은 정춘풍의 수제자라 하고 『조선창극사』에서는 유공렬이 박만순의 제자라고 하였다. 정춘풍과 박만순 모두 동편제 대명창이다. 유공렬이 두 명창에게 모두 배웠을 가능성이 있는데 다만 유공렬 생존시 판소리 독창회 관련 신문기사에 모두 정춘풍 후계자라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으므로 정춘풍한테 학습한 것은 확실하고 정춘풍, 박만순 두 명창에게 공부했다 하더라도 정춘풍의 수제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1928년 판소리 독창회 당시 유공렬은 단가, 춘향가 중 <몽중가>, <춘당시과>, <어사 남원행>, 적벽가 중 <동남풍 비는 데>를 불렀고 『조선창극사』에 기록된 유공렬의 더늠으로 춘향가 중 <이별가>가 소개되었다.
이 소리들은 공교롭게 이동백 명창이 특기로 했던 곡목과 거의 일치된다. 유공렬의 춘향가 중 <이별가> 사설도 이동백의 <이별가>와 유사하다. 어쩌면 이동백이 같은 충청도 출신의 명창인 유공렬이나 정춘풍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다.
1928년 유공렬 명창의 판소리 독창회 찬조 출연자 명단 중에서 유일한 판소리 전문 명창 강남중이 참여하게 된 인연이 무엇일지 궁금하고 주목되는데 혹시 강남중이 유공렬의 제자이기 때문에 출연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동편제 명창 유공렬이 동편제 명창 유성준과 혈연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알고 싶다.
유공렬의 고향으로 알려진 충청남도 홍성은 명고수 한성준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러한 인연으로 한성준이 권유하여 유공렬이 30년만에 나타나 판소리 독창회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홍성은 유공렬, 한성준 출생지일뿐 아니라 김창룡과 일가족이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고 김창룡 부친 김정근 명창이 홍성에서 별세했고 김창룡의 맏며느리와 김창룡 손녀 김차돈이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한승호의 증언에 따르면 방응규 명창의 고향도 홍성일 가능성이 있다. 홍성은 충청도 판소리의 크나큰 성지였다고 하겠다.
이보형의 증언에 따르면 박봉술의 춘향가 중 덜렁제 <‘궁’자 노래>를 들은 박록주가 예전에 유공렬이 그렇게 소리했다고 말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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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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