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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11년 4월 8일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21-1 (사)대한시조협회 광주ㆍ전남지부 인간문화재 이상술 완제 시조창 임시 전수소 가건물에서.
국악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방송 진행:노재명) 완제 시조창 인간문화재 이상술 명인 현장녹음 장면.
이상술 명인 단소 독주 영산회상 <중령산> 모습과 친필사인.
아래 좌측 사진은 왼쪽부터 차례로 이상술 명인, 박순자 여사 부부 방송 기념 촬영 모습.
* 상기 음반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12인치 장시간음반(LP) 관리번호 MI12LP-2435~2436(2011년 4월 8일 이상술→국악음반박물관 증정)
時調 & 歌曲 - 啐琢同音
장고:손장춘, 현금:구윤국, 대금:조창훈, 피리:정재국.
학술단체 대한시우회 전남도지부 사업부 이만구 제공, 發賣元:三和레코드社, 제품번호 없음(2LP), 1960년대 후반 녹음 제작.
앞표지 왼쪽부터 차례로 이상술·고민순·강신경·정경태 흑백사진 수록.
더블자켓 안쪽 면에 정경태·강신경·고민순·이상술 흑백사진과 약력, 수록곡 가사가 실려있음.
[제2집] 제1면 1.평시조(태산이 높다 하되) 이상술 2.사설시조(창외삼경 세우시에) 이상술
* 2011.4.8.16:00~20:30.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21-1 (사)대한시조협회 광주ㆍ전남지부 인간문화재 이상술 완제 시조창 임시 전수소 가건물에서 노재명이 이상술 명인을 인터뷰하고 2011.4.16.19:30~21:00.국악FM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진행:노재명)에 방송된 내용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신 이상술 명인께 깊이 감사드립니다.(2011.5.21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명인실에 발표)
* 이상술 명인: 2011년 7월 19일(양력) 별세.
완제 시조창 인간문화재 이상술 명인 증언 내용
대담ㆍ채록/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안녕하십니까. 노재명입니다. 각 고을마다 특유의 사투리가 있듯이 각기 특색있는 풍속과 민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악의 정가 분야 또한 각 지역마다 억양에 맞는 노래가 있었는데요 시조창의 경우 서울 경기도에 경제, 충청도에는 내포제, 경상도에 영제, 그리고 전라도에 완제 시조가 전승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중에서 전라도 완제 시조창의 인간문화재 이상술 명인에 대한 방송을 마련했습니다. 호남 지역의 정가 문화 일평생 국악에 헌신한 명인의 삶을 만나 보는 시간입니다. 이상술 명인을 만나기 위해서 여기 광주광역시의 전수소에 국악방송 중계차가 와 있습니다. 이상술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상술: 예, 안녕하십니까.
노재명: 최근에 감기 걸리셔 가지고 건강 상태가 안좋으신데 얼굴이 좀 피곤해 보이세요.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연세가 어느 정도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상술: 정묘생, 여든 다섯 살, 토끼띠.
노재명: 토끼띠. 예, 맞습니다. 그러면 고향이 전라도 나주로 말씀을 들었는데 그 고향 주소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시나요?
이상술: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노재명: 번지가 766번지가 맞으시구요?
이상술: 예, 766번지.
노재명: 예. 그러시구요. 동네가 예전부터 판소리 명창 김창환씨가 거기가 고향이고 풍류가 아주 넘쳤던 마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 나주가.
이상술: 예, 거기가 인자 박희성씨라고 계셨는디 그 면에 바로 윗마을이여 월명진이라고, 그 분이 시조를 그렇게 좋아하고 옛날에 한량으로 유명헌 양반이여. 활 잘 쏘았고 시조 잘하고 그런 양반 있었어요. 그러고 저 광산에 가서는 박남규씨라고 또 허는 분이 광산군에 가서 그래서 광나제라고 허거든. 광주, 나주 제라고 그래서 그렇게 시조, 시조덜이 그렇게 성황리에 불렸어요.
노재명: 예, 그러니까 그 완제 시조 전승 지역 중에서도 그 선생님 고향 나주 쪽이 아주 세력이 아주 막강했구만요 거기가.
이상술: 예.
노재명: 예, 그러고 그 어린 시절에 아마 전래농요도 들으시고 전래동요도 들으시면서 자라시고 농악, 풍장 치는 것도 이제 보고 자라셨을 텐데 유독 거기에 시조창이라든지 또 그 향제 줄풍류, 영산회상 같은 거 그런 것도 많이 어렸을 때 접해 보셨나요?
이상술: 그러니까 그 땍에는 왜정 때가 되나서 뭐 풍류나 뭐뭐뭐 이런 것얼 못했어요. 우리는 그런 것을 못허고 여하튼 8.15 해방이 되았제. 그렁깨 뭐 그런 것얼 모르고 8.15 해방이 되니깨 박희성씨라고 그 냥반이 나 보다가 인자 해방도 되고 했으니 우리 것얼 찾아야 된다, 그 시조를 해라, 그래서 내가 이제 시조럴 허게 되았어요.
노재명: 그러면 이제 광복 후에 시조창에 입문하신 걸로 이렇게 약력에 기록이 돼 있는데 그러면은 그 박희성씨, 그 분이 첫 번째 스승이 맞으세요?
이상술: 예, 예.
노재명: 예, 처음에 무얼 가르쳐 주시던가요? 그 분이.
이상술: 그 분이 평시조 <남산은 천년산이요> 하는 가사가 있어. 그거를 배왔어요 그 양반한테.
노재명: 부친께서 성함이 이 ‘호’자 ‘곤’자, 모친께서 전 ‘양’자 ‘순’자 쓰시는데 그 어르신들은 이런 풍류, 국악에 조예가 있으셨나요?
이상술: 없어요.
노재명: 그러면 농사 짓는 분들이시고요.
이상술: 예.
노재명: 그러시고 형제간에도 이 국악을 좋아하시는 분 안계세요?
이상술: 그런 사람도 없고.
노재명: 예. 그러면 그 박희성씨가 말하자면 국악에 처음 발을 들여 놓게 만드신 분인데 그 분은 그러면 평소에 어떻게 알고 지내시는 분이셨어요? 그 냥반이 같은 면에 살고 윗마을에서 살고 또 아부지 허구 친구간이여. 친구지간이야. 근디 우리 아부지께서는, 선친께서는 일찍 돌아가셨제.
노재명: 그러면 그 박희성씨한테 평시조 가사를 처음 배우셨고 그 다음에 또 어떤 거 가르쳐 주시던가요?
이상술: 그 냥반한테 인자 시조를 쭉 배우고 또 박남규씨라고 있어, 박남규씨라고.
노재명: ‘남’자 ‘규’자.
이상술: 음, 그 양반한테 또 배우고 인자 했는데 인자 촌에서 그 양반한테 그렇게 시조럴 배와 가지고 촌에서는 인자 잘한단 말얼 내가 들었거덩. 아조 명창이라고. 인자 그랬는디 여그 광주를 오게 되아 갖고 광주를 나왔어. 광주를 나왔는디 광주국악원에 안치선씨라고 헌 분이 계셨는데 거기를 찾아가문 국악에 대해서 더 자상시럽게 알 것이다. 그래서 인자 안치선씨한테 찾아 갔지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시조럴 좋아하는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시조럴 배왔다고 얘기를 했더니 시조럴 해 보라는구만 한번 해 보라고. 그래 시조럴 허니까 그 안치선씨 그 냥반이 깜짝 놀래면서 자기가 나를 갈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나한테 시조럴 배와야 하겄다고. 응, 시조럴 잘한다고 인자 그래. 그래서 그러면서 인자 그 땍에 그 냥반이 이 정경태 석암 선생 이하 주욱, 유종구 선생, 고민순 선생 하구 서이럴 얘기를 해요. 그 분덜이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시조럴 잘하시는 분이라고. 아 그래서 인자 그럴 땍에 인자 정경태 선생, 유종구 선생, 고민순 선생얼 내가 이름만 내가 알았제. 인자 그런디 그 분덜얼 내가 만나 봐야, 내가 만나 보고 시조럴 좀 들어 보고 해야 인자 도움이 되겄길래 좀, 그 분덜얼 어떻게 만날 수가 있겄냐고. 긍개 만날 수가 있지야 하고 연락을 허먼 만날 수가 있다고. 그래서 이 정경태 선생얼 1년만엔가 만났어 이 광주에서. 그래서 인자 당신이 광주에서 헐 일이 있어서 왔는디 그 틈에 인자 내가 만나서 인자 인사럴 드리고 했는데 그래 인자 이 냥반 시조럴 들어 보니까 거그서 거긴데 쪼끔 약간 틀린 데가 있고 그래. 그래서 인자 그렁가비다. 시조라는 것언 선생마다 쪼끔썩 다 틀리거덩. 똑같덜 않이여. 그래서 이 냥반얼 뵈었고 유종구 선생얼 또 광주로 오라게서 만나 갖고 또 시조럴 해 보고. 그리서 가곡언 유종구 선생한테 내가 배왔고 인자 시조는 이 석암 정경태 선생한테 인자 대충 인제 이렇게 고치고 인자 닦으고 인자 했어. 했는디 긍개 그 땍에 어떻게 됐능고 허니 나는 나대로 해서 아니다. 정경태 선생 시조가 내가 배운 것 허고는 아니여. 그것얼 내가 느꼈어요.
노재명: 예.
이상술: 그래서 인제 이걸 어떻게 허냐 허고 인자 고민얼 했어. 근디 이분들이 이미 우리나라에서 시조로 해서 아조 그냥 뭣이 유명헌 분덜이 되아 부렀거덩. 그러고 나는 거기다가 내 놓을 수가 없어 내 시조는. 일이 그렇게 되았어. 그래서 인자 그렁갑다 했으나 인자 내가 배운 거시기가 있기 따문에 얼렁 이 양반덜 시조럴 내가 따라갈 수가 없었제. 그랬는디 천구백육십오년도나 될 거에요. 천구백육십오년도에 인자 저 냥반 정경태 선생얼 만나 가지고 또 여관에서 같이 자게 되고 그랬어. 근디 인자 저 냥반이 나한테 가사 써 가지고 시조럴 한번 해 보라고 그래 나 보다가. 그래 시조럴 허니까 자기는 인자 자기 허고 나 허고 틀린 디를 비교해 가지고 연구헐라고 나 보다가 불러 보라고 했등가비어. 긍개 인자 내가 부르고 그렁깨 고개를 까닥까닥하고 그렇게 해서 저 냥반 허고 친절하게 되았는디 낭중에넌 완제 시조가 당신 것이 아니고 내가 한 것이 완제 시조가 틀림이 없다. 그것얼 저 냥반이 느꼈어. 그래 가지고 완제 시조는 자네가 옳게 허네. 그래 자네 시조럴 완제 시조로 내가 채보럴 해야 쓰겄네. 악보럴 맨들어야 쓰겄네. 그래서 악보럴 맨들았어요 내 시조로. 그, 그 악보가 시방 전국으루 시방 부르구 있제. 그것이 완제 시조 악보가 내가, 내 제, 내가 배운 제로 해서 저 냥반이 채보럴 해 가지고 헌 것이 시방 완제 사에요.
노재명: 그래서 1950년대, 60년대, 70년대까지만 해도 이러한 지역, 각 지역의 내포제, 완제, 영제, 이런 시조가 고유의 그런 창법들이 전승이 됐는데 이제 석암 정경태 선생님이 전국적으로 석암제를 유행시키시면서 사실 조금 완제랄지, 영제 이런 시조가 전승이 이렇게 활발하게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듣기에도 1970년대서부터 이상술 선생님, 지금 방송 같이 하고 계시는 이상술 선생님께서 완제 시조의 아주 그 고풍스러운 대가로 그렇게 정평이 나서 많은 그 국악학자 분들이 선생님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조사를 이렇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로 고향이나 광주에 은거하시면서 이렇게 소박하게 활동을 하셔서 사실 서울 중앙무대에서는 선생님을 뵙고 싶어도 소리를 못들어 본 그런 애호가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마 오늘 이 방송이 선생님을 뵙는 그 첫 번째 만남인 그런 청취자 여러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 아까 언급해 주신 그 박희성씨는 나주, 고향이 같은 어른인 것으로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고 그 분이 아마 이 완제 시조라든지, 완제에 대해서 많은 그 큰 가르침을 주신 기초를 닦아 주신 것 같고 그 박남규씨는 고향이 어디 분이신가요?
이상술: 광산.
노재명: 아 광산 분이시고.
이상술: 광산.
노재명: 그러면 그 분은, 몇 살 때 그 분한테는 배우셨나요?
이상술: 그 때 같이 박희성씨한테 평시조 사설얼 배우고 나서 박남규씨가 쪼끔 수준이 더 높아. 그래서 인자 질름 시조럴 그 냥반한테 배우고 인자 그랬지요. 그랬는데 글 땍에는 시조가 물론 인자 완제, 영제, 내포제가 있었지마는 완제 시조는 내가 지금 인자 생각허기로는 박남규씨허고 박희성씨가 대표적이었었어 역시. 완제가 또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인자 시조로 이렇게 하고 보니까 그 냥반덜이 완제 시조럴 옳게 했어요. 그렁개 인제 석암도 그것이 인자 옳다고 해 가지고 악보도 그렇게 맨들고 그랬죠. 그러고 석암 선생이 그걸로 문화재가 될라고 신청을 했거덩 시조로. 근디 문화재가 못됐어. 당신은 시조로 문화재 자격이 없다고. 그래서 그 가사로 문화재를 지정을 해 줬거덩.
노재명: 네, 그러면은 그 박희성씨는 지금 이상술 선생님보다 연세가 어느 정도 위신 분인가요?
이상술: 나 보다 나이가 시방 한 스물 다섯 살, 이십오년.
노재명: 네, 그리고 박남규씨는요?
이상술: 그 분, 그 분도.
노재명: 네, 비슷한 연배시구요.
이상술: 그런 정도고.
노재명: 그 다음에 안치선씨는 이제 제가 알기로는 광주 지역의 향제 줄풍류, 영산회상 이런 음악도 잘 연주를 하셨고 거문고랄지 또 이제 정가도 잘 하셨던 것 같은데 이 분은 처음 만나신 게 몇 살 때셨어요?
이상술: 내가 그 냥반얼 만났을 땍에? 칠십년도에 내가 여그 광주로 올라 왔거덩. 그래 가지고 그 냥반이 광주국악원에서 계셨어. 그래서 인자 인사를 드리고 그랬지. 그렁깨 이 냥반언 거문고, 단소, 인자 이런 것얼 주로 인자 허시고 그랬지. 그러고 목이 안좋아 갖고 창은 못했고.
노재명: 네, 그 다음에 유종구, 고민순, 정경태 그런 분들 하고도 교류가 있었던 것 같은데 유종구씨한테는 가곡을 몇 살 때 배우신 건가요?
이상술: 글 땍에, 그 때 무렵이여.
노재명: 네, 이십대 때.
이상술: 그 때 무렵에 그 냥반한테 가곡 쪼끔 배우다가 낭중에는 정경태 선생한테 했제.
노재명: 그러면 석암 정경태씨한테는 어떤 걸 배우셨어요?
이상술: 저 냥반한테는 가곡을 많이 배웠제 내가.
노재명: 네, 정경태씨한테요.
이상술: 응, 가곡.
노재명: 고민순씨한테는 뭐 사사하신 일이 없구요?
이상술: 응, 고민순이 허고는. 고민순이는 그 땍에 마산 가 있었는데 고민순이는 인자 석암 제자로서 인자 잘 한다는 말만 듣고 인자 그랬지. 그 사램이 크게 활동헌 것이 없어요.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완제 시조창의 예능보유자 이상술 선생님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여기는 광주광역시의 시조창 전수소에 와 있습니다. 그 어린 시절에 나주에서 성장하시고 광주에는 그러면 몇 살 때 오신 건가요?
이상술: 광주에 칠십년도에 여길 왔어, 왔어요.
노재명: 아, 예. 그러면 나주에 계시는 동안에는 말씀 듣기로는 배 농사 과수원을 하신 것으로.
이상술: 과수원은 안코 농사만 많이 지었제. 농사를 많이 지었어.
노재명: 배 농사요?
이상술: 응, 배 농사.
노재명: 네, 여기서 잠깐 이제 선생님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시조창을 좀 부탁을 드릴까 하는데요 왜냐하면 청취자 여러분들이 어 굉장히 연로하신데 국악 아주 좋아하는 분들도 아 처음 들어보는 창일 거 같애요. 왜냐하면 선생님이 아까 말씀 드린대로 서울 중앙무대에 이렇게 조명 받으면서 그렇게 막 나서시는 성품이 아니고 아마 이렇게 조용히 사시는 그런 성격이라 처음 이 소리를 들어 보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애서 사설시조 한곡 부탁 드려도 괜찮으실까요?
이상술: 예.
노재명: 네, 그러면 그 이상술 선생님께서 사설시조창 <명년 삼월에> 청취자 여러분들에게 좀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이상술 사설시조창 <명년 삼월에>(무반주) 즉석 현장 녹음.
이상술: 여까정만 합시다. 목이 전히 안나오는구만.
노재명: 예,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좀 부탁을 드린 건데 무반주로 사설시조창 <명년 삼월에> 이상술 선생님께서 청취자 여러분들에게 특별히 선물로 이렇게 즉석에서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뵌 국악인 분들 중에 귀가 제일 잘 생기시구 제일 크신 것 같애요.
이상술: 하하하하하하하.
노재명: 예, 그런 말씀 많이 들이시지요? 평소에.
이상술: 예.
노재명: 예, 그래서 이렇게 장수를 하시고 85세 연세에도 이렇게 시조창을, 감기가 걸리셔 갖고 중간에 좀 목이 좀 안나온 부분도 계시지만은 아주 건강하게 이렇게 장수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 시조창 이런 정가가 단전호흡이라든지 이런 노래 할 때 호흡에 굉장히 좋다 그래서 건강에도 굉장히 유익하다 이렇게 알려져 있는데 그 시조창을 하시면서 굉장히 즐겁고 이게 진짜 건강에 좋구나 하는 거를 느끼실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술: 암만. 인자 호흡얼 조절해서 쉬니까 인자 호흡 허는 거시기가 워녀니 다른 사람 보담은 더 호흡이 길고 인자 그러지요. 근디 내가 한가지 디릴 말씀언 방금 인제 <명년 삼월에>럴 인자 불렀는데 옛날 양반덜언 시조럴 기냥 가사에다가 곡 붙여 갖고 그렇게 기냥 자기 맘대로 했거덩. 근디 지금언 시조럴 절대적으로 문법얼 가려서 시조럴 불러요. 그러니까 문법이라고 그러면 긴 발음이 있고 잘룬 발음이 있고 그러거덩. 그러니까 긴 발음언 길게 붙이고 잘룬 발음언 잘룹게 붙이고 그것얼 인자 문법이라고 그래. 그런데 옛날 양반덜언 예를 들어서 “한산서어어엄” 인제 이렇게 허지마는 지금은 ‘섬’이 아니고 ‘섬’이거덩. 섬 ‘도’자라고 섬 ‘도’자가 아니여. 그러먼 “한산서어어어엄”, “서어어어엄” 옛날 양반덜언 “서어어엄”, “서어어엄” 이렇게 기냥 붙여 버렸거덩. 그래서 이런 것이 상당히 인자 발전적이고 인자 그래요.
노재명: 예, 그러면 저희가 이 완제 시조를 한번 들어 보니까 전라도 호남 사투리처럼 굉장히 따뜻하고 구수한 그런 느낌이 나는데 여타 충청도의 내포제라든지, 경상도의 영제, 요런 시조 하고 좀 구별되는 서울의 경제라든지 이런 시조 하고 다른 그 완제 시조의 특수한 특징이랄까, 어떤 부분이 특수하게 매력 있다, 이런 걸 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상술: 그렁깨 완제 시조라고 그러면은 법이 있어 법이. 덜나법이라고 꺾어 내리는 것도 완제 시조에는 법이 있고 대여, 황종 붙이는 디도 붙이는 법이 따로 있고 유빈, 중여를 붙이는 디도 법이 따로 있고 그래요. 근디 내포제나 영제나 경제는 그것이 정확하덜 못해. 근디 이 완제는 아조 그것이 명확허니 아조 정확허제. 인자 그런 것이 틀려요.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광주광역시 완제 시조창의 인간문화재 이상술 명인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여기는 국악방송 중계차가 와 있는 광주광역시의 전수소입니다. 이렇게 한복을 아주 단아하게 딱 차려 입으시고 더불어서 아주 풍류가 넘치는 시조창을 이렇게 설명과 더불어서 오늘 아주 만끽할 수 있게끔, 아주 풍류가 넘치는 지금 순간에 있습니다. 그 이제 본명이 이 ‘상’자 ‘술’자 쓰시구요?
이상술: 예.
노재명: 그게 본명이시고 그 다음에 아호가 근촌이신데 이 호는 같이 교류하시던 그 정가 스승님들이나 선배 이렇게 그런 분들이 지어 주신 건가요?
이상술: 예, 예.
노재명: 네, 어느 분이 지어 주신 거에요?
이상술: 박남규씨라고 그 분이 근촌이라고 호를 지었어.
노재명: 왜 근촌이라고 지어 주셨을까요?
이상술: 삼가헐 ‘근’자, 마을 ‘촌’자거덩. 근디 그냥 삼가헐 ‘근’자는 항상 뭐이던지 삼가허고 마을 ‘촌’자는 아조 낮은 글자여. 마을 ‘촌’자, 아조 저 아조 뭐시기 헌 마을이거덩. 그래 마을에서 이렇게 근신허고 산다 인자 그런 뜻이여.
노재명: 그, 정확하게 지어 주신 것 같은데요 왜냐하면 다른 분들처럼 서울로, 사방으로 다니시면서 활동하고 그렇게 드러내는 성품이 아니시고 아까 설명 드린대로 고향을 중심으로 이렇게 은거하시면서 소박하게 사시는 모습이 그 스승님이 지어 주신 호대로 그렇게 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광주국악원에서 이제 선생님 젊으셨을 때 한 60년도 무렵서부터 강사 활동을 이렇게 국악을 가르치셨다고 그러는데 어떤 음악을 가르치셨나요?
이상술: 내가 갈친 것언 시조, 그 다음에 이 단소, 그 다음에 북 소릿뿍. 그렁 걸 가르쳤어요.
노재명: 60년도서부터 몇 년 광주국악원에 계셨나요?
이상술: 광주국악원이 없어지기럴 팔십년또에 없어졌어. 그 때까장 내가 있었제. 그래 갖고 팔십년 이후로 시립국악원이 생겼어 광주. 그래 시립국악원으로 옮겼제. 그래 시립국악원에서 시조 강사, 단소 강사로 있었어요.
노재명: 그러면은 그 때 시조, 단소, 소리북을 가르치셨다고 그랬는데 시조는 아까 말씀하신 그 선생님들한테 배우신 거고 그러면 단소는 어느 분한테 배우셨나요?
이상술: 안치선씨한테.
노재명: 아, 안치선씨한테요. 소리북은 어느 분한테 배우셨어요?
이상술: 여러 사람한테 배왔제 소릿뿍언. 여러 사람들한테 좋은 가락 있으먼 그 놈얼 따고 인자 그렇게 해서 했지요.
노재명: 예, 그러면은 말씀 듣기로는 이제 안채봉씨라든지, 한애순, 박춘성, 이런 광주의 여자 명창 분들이라든지 판소리인들 하고 교류가 좀 활발하셨던 것 같은데 그 특별한 무슨 계기가 좀 있으셨나요 판소리 하는 분들과 교류하게 된.
이상술: 긍개 내가 인자 장단얼 칠 줄 아니까 안채봉, 한애순, 뭐 박춘성, 이런 분덜언 소리럴 헐 줄 알고 긍개 자연히 인자 접근허게 되고 내가 장단 치고 소리 허고 인자 그렇게 됐지요.
노재명: 그러면 광주에서 소리북을 배우셨으면 김성권씨라든지, 일산 김명환씨라든지, 그런 분들한테 배우신 건가요 소리북을?
이상술: 장단언 김명환, 김명환은 광주 안있었거든. 주로 서울 가 있었고. 내가 광주국악원을 내가 운영을 했거덩. 내가 광주국악원을 했어. 긍개 내가 원장얼 허고 북얼 김성권이 보덤 내가 더 잘 친다고 그렇게 그런 평얼 내가 받았어.
노재명: 그러면 그 당시에 광주국악원에 판소리 사범은 정광수씨 같은 분들이 거기 계셨나요?
이상술: 아, 정광수 선생도 광주서 선생질얼 했고 내가 국악원을 헐 땍에는 딴 디서 선생질 허고 김성권이가 선생질 허고 인자 그랬어.
노재명: 예, 그러면 판소리 반주도 해 보시고 시조, 가곡, 이런 정가도 직접 노래를 해 보시고 하다 보니까 판소리 하고 또 이 시조 하고의 어떤 공통점이라고 그럴까, 서로 차이점이나 다른 점, 비교해서 말씀해 주시면 어떤 음악적인 차이나 공통점이 있을까요?
이상술: 판소리는 판소리대로 좋은 디가 있고 인자 그러고 시조는 시조대로 좋은 데가 있는데 말하자면은 판소리는 우리 서민덜이 인자 알아 듣기 쉽게 허는 디가 거, 말이. 인자 그러고 시조는 인자 문장이 뭣이냐 인자 그런 디가 달분 데가 있제. 다른 것은 다 같어요 박자나 이런 것언.
노재명: 그 특히 이제 춘향가 중에 <적성가> 같은 데 가곡의 그런 우조 목이 나온다든지 뭐 이런 부분 반주하실 때는 그 성음이라든지 그런 이제 가곡 음악을 잘 아시니까 훨씬 그 반주를 잘 하셨을 거 같아요 소리북 반주를.
이상술: 암, 으응응, 그러제.
노재명: 그러고 그 다음에 이 시조창 정가 하시는 분들이 노래만 하신 게 아니라 아까 선생님 설명하신 것처럼 거문고, 단소, 이런 악기를 풍류 악기로 많이 다루셨는데 단소를 해 보시니까 시조나 가곡 하실 때도 아무래도 관악기 연주를 해 보시면은 도움이 좀 되실 것 같습니다.
이상술: 여하튼 이런 악기도 그러고 시조도 그러고 호흡 조절을 잘 해야 인자 음악이 좋게 나오고 인자 그래요. 인자 그런 것이 단련이 되제.
노재명: 예, 그러고 지금까지 이제 1960년도 경서부터 지금까지 거의 반세기 이상을 광주국악원을 비롯해서 여기 광주전수소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자 분들을 양성하셨을 것 같은데 대략 손가락으로 이렇게 어림 잡아 보면 한 몇 분 정도가 제자 분을 가르치신 것 같으세요?
이상술: 가르친 뭣이냐 흔적은 없어도 내가 알기론 수 백명 되는데 지금 현재로는 제자라고 하먼 전국적으로 한 오십명 가량밖에 안되는 것 같어. 내가 시어 봉개. 근디 직접 나한티 시조 배와 가지고 강사럴 하고 있고 모다 그런 사람덜 한 오십명 되아.
노재명: 예, 그러면은 그 중에서 통틀어서 말씀해 주신 제자 분들은 몇 백명이고 그 다음에 그 중에 지금 활약하시는 분은 한 오십여 분 되는데 그 중에서 이제 대표적인 수제자라고 그럴까 어떤 분들을 좀 꼽을 수 있을까요? 제자 분 중에 좀 큰 제자.
이상술: 현재 시방 대통령상 받은 사람이 둘이고 국개의장상(국회의장상) 받은 사람이 한나, 그렇게 해서 세, 세 사람이 있어요. 그 세 사람이 시방 현재 이 광주 가 있어요.
노재명: 예, 그러면 그 많은 제자 분들 중에 특별히 이제 오늘 제자 분들 이렇게 선생님 방송 하신다고 그래서 같이 나오신 제자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제자 분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상술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이렇게 조명을 해 보는 그런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먼저 이상술 선생님의 제자 되는 김순경씨가 이상술 선생님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순경: 안녕하세요.
노재명: 선생님께서 아주 자랑이 많으신 그런 수제자신데 처음 어떻게 이상술 선생님 만나셨어요?
김순경: 열아홉살 때요. 이렇게 길을 지나가는데 어디서 막 거 뭔 소리가 들리드라구요. 그래서 그 때 제가 좀 가야금을 배우러 다녔었거든요. 그래서 인저 가야금 그 선생님한테 가 갖고 “여기 지나 오는데 뭔 시조 소리가 들리드라” 그렁깨 “거 괜찮애?” 그래서 “예, 여럿이 허대요” 그렁깨 “거기 구경을 한번 가자”고 그러더라구요. 그래 갖고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됐어요.
노재명: 그러면 이제 열아홉살 때도 뭔가 느끼는 바가 있어서 배워 봐야 되겠다 하셨을 거고 이상술 선생님께서 특수하게 지도력이 좋으신 것 같은데 가르치실 때 비법 같은 거 어떻게 강조하시는 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김순경: 선생님은 적당히는 절대 없으신 분이에요. 완벽해야지. 그러니까 절대 될 때까지 그 전에 제가 이렇게 속청이 좀 잘 안나왔어요 쉬어서. 앉인 자리에서 한 이십분을 속청 그거를 연습을 시키는데요 나중에는 머리가 빙빙빙빙 돌아요. 그럴 정도로 아조 완벽해야 되요. 선생님이 무섭습니다. 하하하하하.
노재명: 그 어느 정도로 호되게.
김순경: 선생님은 평소에 이렇게 얘기허고 이렇게 허실 때는 한나도 안무서우세요. 근데 일단 딱 공부를 딱 시작했다 하면 그 때는 요러고 앉었으면은 방석이 촉촉하니 젖을 정도로 무스와요. 저는 그래요.
노재명: 가르치실 때는 무섭지만 말씀 듣기로는 평소에 제자들한테 잘 안배울라고 그러면 밥도 사 주면서 그렇게 가르치셨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이 선생님의 따뜻한 부분이다 하는 거를 좀 설명 부탁드립니다.
김순경: 선생님은 배우는 사람이 어디를 어떻게 해요 자꾸 이러면은 선생님은 그거를 마다를 안하셔요. 다 가르켜 주셔요. 더 외려 선생님언 좋아하셔요.
노재명: 끝으로 선생님 지금 85세신데 좀 더 배웠으면 좋겠구 어떤 것을 같이 해 봤으면 좋겠다 이렇게 포부라든지 그 축원 덕담 부탁드립니다.
김순경: 오래 오래 사시면 우리가 공부를 허죠. 그러니까 더 건강하셔야 되고 마음을 편하게 계시면 더 좋겠어요.
노재명: 예, 고맙습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광주광역시 인간문화재이신 완제 시조창 명인 이상술 선생님과 함께 방송을 하고 있는데요 오늘 특별히 제자 되시는 김순경씨가 스승 이상술 명인에 대해서 인터뷰를 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이상술 선생님의 친따님이자 시조창을 오랫동안 배운 제자격인 이미화씨가 스승이자 아버지인 이상술 명인에 대해서 인터뷰를 해 주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미화: 예, 안녕하세요.
노재명: 그 선생님께서 85세시고 평생을 이 시조창에 헌신하셨는데 특별히 또 따님께서 이 맥을 잇고 계시니까 굉장히 든든하고 좋아하실 것 같애요.
이미화: 이렇다 저렇다 인제 표현은 안하시지만 그래도 자식이 해 주니까 또 혹시 좋지 않으실까 하하하.
노재명: 그러면 처음에 이걸 한다고 본인이 말씀 하신 겁니까, 아니면 아버님이 하라고 하신 겁니까? 어떻게 하게 되셨는지.
이미화: 음, 제가 한다 했어요. 뭐 특별한 거는 없는데 어렸을 때부터 인제 제 기억에는 잘 없지만 좀 무섭게 가르쳤어요. 근데 그거를 옆에서 제가 흉내를 많이 냈다고 하더라구요. 잘 받는 분도 계시구 못받는 분도 계시잖아요. 그러면 응, 그것도 못해 하면서 제가 흉내를 많이 냈다고 하더라구요. 그러고 이제 중학교 때 여기 국악원이었을 때 시립국악원에 인제 뭐 가야금도 배우고 이제 하면서 저두 시조반을 지나 가면서 우연히 시조가 좋다라고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래 가지구 시조를 배우겠습니다 했더니 아버지가 못하게 했어요. 근데 그냥 무작정 갔어요. 방에 항상 앉아 가지구 하니까 나중에는 인제 한번 불러봐 해 가지구 한 게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노재명: 이거를 옛날 오리지날로 하는 분들이 거의 많지가 않고 또 완제 시조가 특별하게 좀 다른 그 시조들 하고 구별되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좀 부탁드겠습니다.
이미화: 저는 인제 이 시조를 있잖아요 표현하고 싶은 게 지역 언언 것 같아요. 뭐 경제 하면은 일단 서울 쪽은 말이 부드럽잖아요. 그니까 시조에서도 경제 자체두 부드럽게 나오구 또 완제 하면은 인제 전라도 쪽이다 보니까 억양이 있어요. 뭐 서울 쪽이나 경제나 내포제나 영제 같은 건 그냥 풀어서 부르는 거를 저희 완제에서는 항상 접어서 불러요. 접는 목이 쫌 많이 있어요. “동창이 밝았느냐” 했을 때 저희 같은 경우는 “동창이이이이” 이 소리가 들어가고 “밝았느으으” 이 소리가 들어가요 “느으으”. 하지만 경제나 모든 다른 시조에서는 그냥 “느으-” 이렇게 풀어서 불러요. 전라도 이쪽 완제는 그냥 “느으으으” 이런 식으로 접어서 인제 불르는 시조가 많아요.
노재명: 그러면 이거를 아버님의 그런 큰 그 역할을 하셨던 거를 자제분으로서 좀 더 발전시켜서 아버님과 더불어서 또 제자 분들하고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뭐 계획을 좀 부탁드겠습니다.
이미화: 음, 제가 전주 도립관현악단 하구 협연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어, 시조를 어떻게 관현악에 맞춰” 이런 말씀들을 많이 했어요. 근데 평이 되게 좋게 나왔었구 시조도 그렇게 좀 대중적으로 하면 좋을 건데 이런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이 없잖아요. 계속 그 틀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 같아요. 서울 쪽에서는 인제 이미 뭐 편곡해 가지고 시조나 가사 같은 거 경우에 이렇게 나오는데 여기 지방 쪽에서는 아직은 쪼끔 인제 힘들지 않나. 물론 제가 그걸 짊어지고 가야 되는데 항상 꿈은 항상 있죠. 이게 인제 언제 현실적으로 될지는 모르겠어요. 하하하.
노재명: 이 지역에서 이제 아버님이 이렇게 활동하시면서 어려운 점도 많이 보셨을 거고 또 본인이 직접 여기서 활동하시면서 어려운 점이라든지 뭐 이런 게 개선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좀 해 보면 좋을 텐데 하는 그런 아쉬움이나 말씀 부탁드겠습니다.
이미화: 정가 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잖아요. 여기 또 더군다나 전라도 쪽에서는 특히나 판소리에 많이 밀리다 보니까 근데 좀 정가 하시는 분들끼리라도 쫌 뭉쳐 가지고 좀 발전을 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지금 현재 여기 여 인제 시조를 하시는 분들 중에 제가 제일 젊은 것 같아요 아직은. 근데 쫌 젊은 사람들도 많이 하고.
노재명: 끝으로 이제 따님으로서 제자 분으로서 바램이라든지 이런 걸 좀 마지막으로 부탁드겠습니다.
이미화: 인제 지금은 건강이 제일 먼저구요. 아버지가 더 건강하셨을 때 이런 인터뷰라든가 했었으면 더 좋은 말씀을 더 많이 하셨고 좋은 소리도 또 들려 주실 수가 있었을 건데 쫌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까 숨도 인제 호흡 같은 경우도 그러고 감기 걸리시다 보니까 쫌 그런 것들이 안타, 안타까워요. 이제 제가 자식으로서 이렇게 봤을 때 앞으로 쫌 건강하셔 가지구 더 많은 제자를 쫌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미화(노래) 이상술(장고) 각시조 <행군견월> CD음반 녹음 방송.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완제 시조창의 예능보유자 이상술 선생님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여기 광주광역시의 시조창 전수소에 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 동안 정가를 직접 배우고 또 가르치고 공연 활동도 하시고 또 제가 기억하기로는 68년도에 정경태 선생님과 안치선씨, 그런 분들 하고 이제 정가 엘피 음반 전축판도 취입을 하시고 지금까지 또 독창 엘피 음반, 또 시디 음반 이렇게 여러 장 음반을 또 내셨는데 그래서 제가 예전에 수집했던 그 음반을 좀 몇 가지 가지고 나와 봤습니다. 그래서 이거 보시면서 그 당시 좀 회고담을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번 보시면서 말씀해 주시지요? 지금 앞에 표지에는 석암 정경태씨의 젊었을 때 사진이 장식이 돼 있고 이 두장짜리 전축 음반을 펼치게 되면 안에 석암 정경태씨의 수묵 그 그림과 글씨가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거문고는 이제 안치선씨가 담당을 했고 여기서 장고 장단을 오늘 방송 출연하신 이상술 선생님께서 담당하고 노래를 정경태씨께서 담당한 그런 음반입니다.(국악음반박물관 소장 12인치 LP음반 관리번호 MI12LP-0523~0524 石菴 鄭坰兌 唱 時調 歌曲, 玄琴·短簫:安致善, 杖鼓:李相珬, 洋琴:羅金喆, 大韓時友會 發行, 三和레코-드公社 제조 SL-10105, 2LP, 1968년 녹음, 1968년 9월 1일 제작) 이거는 어떻게 해서 음반을 취입을 하시게 되셨나요?
이상술: 음, 인자 이 냥반이 또 시조를 그렇게 허시고 그렁개 이렇게 엘피판 취입얼 해 갖고 전국에 인자 보급얼 시키면언 에, 시조 발전상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해서 이것얼 우리가 권했어 음판 취입얼 허라고. 그래서 허게 된 것이여.
노재명: 그러면 이게 음반을 보니까 누가 좀 후원을 하셨는지 기획을 하신 분이 계셨던 것 같은데 누가 이걸 주동해서 주체적으로 만드신 건가요?
이상술: 내가 했는데 돈언 이만구라고 있어요 이만구.
노재명: 그 이만구씨는 어떻게 같은 고향 분이세요?
이상술: 아아 여그 광주서 약방 하는 분이여 약방. 한약방 허는 분이여.
노재명: 아 그럼 그 분이 시조창 이런 걸 좋아하셨나 봐요.
이상술: 좋아허는디 인자 돈이 좀 있어서 그 분한테 협조를 받어 갖고. 그 땍에 돈이 많이 들었어요.
노재명: 그 나금철씨 이름이 보이는데 양금 하신 분. 그 분은 그러면 어떻게 아시는 분이세요? 어디 분이세요? 고향이.
이상술: 전라북도 김제.
노재명: 아 김제 분이세요. 그러면 다 그 분들이 석암 정경태씨 제자거나 다 그 그룹으로.
이상술: 나금철씨 같은 경우에는 석암 우에 분이에요 선배, 선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제. 그런 분이에요. 그러고 안치선씨 같은 분은 인자 같은 뭐시기고.
노재명: 네, 그러시구요. 그러면 이 음반을 내신 다음에 또 이제 엘피 음반을 내셨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로 삼화레코드에서.
이상술: 그니까 이거 낸 다음에 내가 냈거덩. 내가 내 자비 들여서 내가 낸 거요 내가.(국악음반박물관 소장 12인치 LP음반 관리번호 MI12LP-2435~2436 時調 & 歌曲 - 啐琢同音, 장고:손장춘, 현금:구윤국, 대금:조창훈, 피리:정재국, 학술단체 대한시우회 전남도지부 사업부 이만구 제공, 發賣元:三和레코드社, 제품번호 없음, 2LP, 1960년대 후반 녹음 제작. 앞표지 왼쪽부터 차례로 이상술·고민순·강신경·정경태 흑백사진 수록. 더블자켓 안쪽 면에 정경태·강신경·고민순·이상술 흑백사진과 약력 수록)
노재명: 그 때는 그러면 반주를 누가 하셨어요? 그 다음의 음반은.
이상술: 그 때 반주가 조창훈이. 장단은 전라북도 전주의 손안수씨라고 있어. 그 분이 장단을 치고.
노재명: 이거를 음반을 내시고 이거를 보급 활동도 돈 들여서 하시고 이렇게 하면서 집안에서 사모님이나 친구 분들이나 뭐 말리거나 좀 이렇게 안좋은 소리는 안들어 보셨어요?
이상술: 많이 들었제.
노재명: 하하하하. 뭐라고 그러시던가요?
이상술: 이것, 이것 해 가지고 돈이 많이 들었거등. 그렁개 많이 드는디 인자 그 돈이 나와야 하는디 팔기는 돈 받고 팔았어. 그런디 순전히 공짜백이로 다 나가 부리고 돈 다 띠어 부리고 안주고 헝깨 그냥 완전히 망해 버렸제. 이것 해 가지고 돈이 많이 들었어요.
노재명: 그러면 그렇게 음반 몇 장 하시구서 거의 집 한 채 거의 날아간 건가요?
이상술: 집 한 채는 아니라도 많이 없어져 부렀지.
노재명: 예, 그러면은 지금 이상술 선생님께서 사모님이라든지 주변의 여러분들한테 국악을 그만 좀 좋아해라 이렇게 만류도 많이 받고 그러셨다고 그러는데 여기서 그러면 잠깐 이상술 선생님의 사모님, 부인 되시는 박순자 여사님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상술 선생님께서 얼마나 국악을 좋아하고 재산을 탕진하면서까지 국악에 몰두하셨나를 한번 직접 그 부인 되시는 박순자 여사님의 인터뷰를 통해서 잠깐 들어 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까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재산도 많이 까 먹으시고 아마 본인은 원치 않으셨는데 막 여자 분들이 뒤에서 달려 오고 그랬을 것 같은데 고생을 많이 시키셨을 것 같애요.
박순자: 예, 그랬어요. 가정을 모르고 살으셨지. 나는 이제 시골에서 있고 혼자 막 시조 한다고 막 광주로, 막 어디로 돌아다니고 이제 막 그러고 다니셨어. 긍개 나는 이제 전혀 그냥 시조라고 하면 그냥 치가 떨리고 오직허먼은 애기덜이 요러고 테레비럴 딱 틀먼 뭐 국악 같은 것이 나오먼 꺼부러. 으어찌나 아부지가 아조 거기에 그냥 뭐시기를 해 가지고 하니까 우리는 그냥 뭐시기 하고 나는 인자 오직 애기덜 가방끈 안놓고 니그덜얼 내가 어쭈겠든지 나가 갈쳐야지 이대로 니그 아부지만 보고 있다가는 뭔 초등학교도 나올둥 말둥 하다 싶어 갖고 아조 거기에만 나는 그냥 정신얼 썼제. 지금 나이럴 자셔 갖고 인자 몸이 안좋으니까 시방 내가 이러고 따라다니지 일절 나는 아예 간섭도 안코 나는 오직 가정 애기덜 하고만 기냥 지키고 살아야 쓰겄다 나는 그것얼 입때것 오늘날까지 살아 나왔어요 아조.
노재명: 그 따님이 인제 국악을 하게 됐는데 말리지는 않으셨어요?
박순자: 예, 그 애럴 말릴라고 생각은 안했어요. 왜그냐문은 하도 저 애가 어떻게 재주가 좋던지 아조 그냥 잘 하니까, 한다고 모도 사람덜이 그래싸서 안말렸어 그냥. 놔뒀어요 그냥. 저 혼자 예술고등학교 가고 전북대, 그리고 예술대 1회로 졸업했거등요. 그럼서 저 애 뒷바라지넌 내가 다 해 줬지요.
노재명: 아마 지금 사모님 하고 이렇게 뵙고 말씀을 나누다 보니까 그 이상술 선생님이 오늘날 이렇게 장수하시고 그래도 사나이로서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된 그 원천이 사모님의 그런 마음 속 깊은 그런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고생하시다가 95년도에 이제 국가로부터 이제 무형문화재 지정이 이제 어르신이 되셨는데 그 때 소감이 아마 누구 보다도 본인 보다 어떻게 보면 더 눈물 나고 아마 더 기쁘셨을 것 같애요.
박순자: 예, 그랬어요. 그렇게 저렇게 막 문화재가 되신다고 허는 것 보담도 거 시조에 뭐시기 해 가지고 하니까 그 어려와도 그 공부 하라고 옛날에 그 쏘니 거 녹음기 있잖아요 그것이 있시야 한다고 해 가지고 그것도 다 해 줬어요 나는 아조. 그래 갖고 그렇게 시립국악원에도 인자 들어 가시고 무형문화재도 되시고 하니까 쯧, 거시기로 생각하먼 한 없이 눈물이 나오지요 아조 그래도. 그리서 재산 뭐시기 하고 하더니 결국은 이 거시기를 한다고 그랬나 부다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노재명: 지금 다른 사람 얘기인 것처럼 막 듣고 계시는데요 선생님이. 그 제일 좋았던 순간을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박순자: 하하하하하. 거 상 받을 때넌 부산서 큰 상을 받었다고 재봉틸 갖고 왔데요. 그래도 참 시조 해 갖고 하하하 그런 것도 갖고 왔다 싶응깨 하하 그 때 쫌 좋았고 시조 문화재가 되시고 거 시립국악원에 인자 들어 가셔서 또 거 뭐시기 하고 긍깨 그런 거시기로 입때 살었지 난 뭐시기 그러고 살었어도 내 운명이고 팔자다 뭐 그러고 살았어요.
노재명: 앞으로 이제 더 장수하시고 좀 어떻게 가정을 위해서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뭐 그 어르신에 대한 소망과 아내로서 바라는 점, 그런 말씀을 좀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박순자: 긍깨 워낙 저 냥반이 성격이 아조 무사와요 아조. 그러니까 제자덜한테도 좀 따뜻하게 다 안아 주고 그냥 화 내시지 말고 누구던지 다 안아 주고 그러고 글고 지금도 집에서 뭐시기 해도 얼마나 성질이 무서웅깨 그 화만 쫌 안내고 쫌 거시기 하시먼 쓰겄어 아조. 옛날 거 젊어서 같이 하지 말고. 그래도 저 냥반이 승격은 그렇게 뭐시기 해도 거 저렇게 작고 거시기 한닥 해도 그렇게 속이 넓지 조잔하든 안했어요. 하하하하하 그렁깨 그런 것에 뭐시기 헌 것 같어 내가 아조.
노재명: 네, 감사합니다. 광주광역시 완제 시조창 인간문화재 이상술 명인의 부인 되시는 박순자 여사님이 남편 되시는 이상술 명인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 사모님도 아주 맺히신 게 좀 있으신 거 같기도 하고 또 세월이 지나서 추억이 눈물 겨운 그런 부분도 있으신 것 같은데 이렇게 주변의 만류와 이렇게 걱정을 받으시면서 국악을 아주 좋아하시고 평생을 보내셨는데 어떻게 보면 굉장히 복 받으신 분이고 어떻게 보면 부러워하실 분도 계실 것 같은데 왜 그렇게 국악이 좋아서 이렇게 어디가 좋으시던가요?
이상술: 음 허허, 글쎄요. 젊어서 부터서 북얼 좋아하고 허면서 시조럴 좋아했거덩. 근디 그것얼 못놓고 지금까지 허고 있어요.
노재명: 그러면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음악, 이거를 제일 좋아한다 하는 그런 뭐 정가라든지, 판소리라든지 어떤 음악이 있을까요?
이상술: 시조에요 시조.
노재명: 네, 그 판소리 반주도 명고수다 이제 이런 평을 들으시고 많이 활동하셨는데 이렇게 듣기에 어떤 분 판소리가 제일 앵기시고 좋으시던가요?
이상술: 내가 좋아한 사람언 한애순이 하고 한애순.
노재명: 네, 광주 인간문화재.
이상술: 광주에 있는 한애순, 한애순이 소리럴 내가 좋아했지요. 또 북얼 치문은 내가 쳐 주문은 또 좋다고 했고.
노재명: 네, 단소도 이제 아주 오랫동안 연주를 해 오셨는데 아마도 한 60년 정도를 단소를 부신 것 같애요. 그래서 그 공력을 이제 이 청취자 여러분들한테 한번 좀 보여 주셨으면 좋겠는데 단소 독주 좀 부탁드릴께요.
이상술: 하하하하 아이고.
노재명: 네, 이상술 명인의 단소 독주로 영산회상 중에서 <중령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상술 단소 독주 영산회상 중에서 <중령산> 일부 즉석 현장 녹음.
이상술: 여까정만 합시다. 안되겄구만 전혀.
노재명: 예, 감사합니다. 이상술 명인의 단소 독주로 영산회상 중에서 <중령산> 감상해 보셨습니다. 이렇게 감기 걸리시고 연로하신데 이렇게 즉석에서 부탁드려 가지고 죄송스럽고 김이 이제 이렇게 강하게 조절이 잘 안되신 것 같애서 좀 안타까웠습니다.
이상술: 단소를 옛날에 단소를 모다 거문고, 가야금, 양금, 단소, 피리까장 해서 이렇게 합주럴 하거덩 영산회상을. 그럴 적에 내가 꼭 단소럴 내가 불었어요 옛날에. 긍개 지금도 줄풍류 단소럴 다 나 보다 잘 분다고 그런 평얼 받고 그랬는디 지금언 소리 조차 내덜 못하니까 뭐 헐 말이 없는데 여하튼 좀 불고 허먼 입김이 들어가고 허먼 소리가 나요. 근디 오늘 인자 몇 년간 안불다가 이렇게 하니까 소리가 안나고 시방 그러네요.
노재명: 예, 예전에 그 정자라든지 풍류방에서 이런 영산회상, 그 풍류 하시던 어르신들이 같이 이렇게 둘러 앉아 가지고 영산회상 합주도 하시고 시조창도 읊으시고 굉장히 정겹고 그 시절에 아마 그리우시고 그 시절이 많이 생각나실 것 같은데 그 때 그 정취가 어땠었나요? 풍류방에서 같이 모여 가지고 동네 풍류 아시는 분들 하고 어울리실 때 그 정취가 어땠는지 설명 좀 부탁드릴께요.
이상술: 그러니까 이 풍류럴 합주를 한다 그러면 첫째 거문고, 가야금, 피리, 젓대, 해금, 단소, 이렇게 해서 여러 악기가 이렇게 합주를 허는데 한 사램이라도 쪼끔만 음정이 틀리그나 박자가 틀리그나 하먼 안돼. 열이면 열이 똑같이 이렇게 나가는디 인자 매력이 있고 참 듣기가 좋고 참 신선이 하강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고 그러지요. 그래서 영산회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에요. 근디 지금은 많이 시방 사라져 가지고 옛날 같이 그렇게 허덜 못해 지끔 사람덜언. 그러고 이것 해 봤댔자 별 크게 뭐 도움이 안되고 그러니까 발전이 안되지요.
노재명: 지금이야 이제 그 무형문화재 제도라든가 또 경연대회를 통해서 상을 줘야지만이 이런 음악도 하고 또 문화재 지정을 이렇게 해서 명맥이 보호가 되고 있습니다마는 지금 선생님 말씀해 주신대로 선생님 젊으셨을 때는 뭐 누구한테 보여줄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박수 받을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상 받을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풍류방, 정자에서 이 음악이 좋아서 정말 거문고도 튕기시고 단소도 부시고 시조창을 그렇게 읊으셨던 그런 모습을 상상만 해도 멋스럽고 참 그렇게 좋은 분들 하고 좋은 시절 보내셨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 때 교류하셨던 분들 중에 한약방 하시던 분도 아까 계시다고 그랬고 각양각색의 그런 분야에 계시던 분들이 같이 시조창을 이렇게 풍류를 하셨던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분들이 어떤 분들이 계신가요? 후원하시고 이런 풍류 음악 좋아하시고 그랬던 분들.
이상술: 거의가 다 고인 되아 부렀어요. 찾아 볼 수가 없어 다 고인 되아 부러서. 예를 들어서 한약방을 허먼 한약재를 허먼서 긍개 이런 것얼 풍류럴 좋아했거덩. 그래 인자 나와서, 국악원에 나와서 어울려 가지고 같이 허고 그런 분이 옛날에는 많앴어. 그런데 지금언 없어요 지금언. 그런 사램이 없어.
노재명: 그렇게 해서 이제 대한시우회라는 모임의 임원도 하시고 광주, 전남의 그런 시조창 지부장도 역임하시고 그 다음에 전국 시조 경창대회에 또 직접 나가셔서 1등 이제 수상도 하셨었고 그 다음에 시조창 심사위원도 경연대회 다니시면서 하시고 또 그런 시조창 좋아하는 분들이 이제 후원하고 뒷받침을 해서 전국에 시조 경창대회가 또 많이 개최가 되고 그런 줄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 경창대회에 나가셔서 명창부 1등 하신 때가 63년도가 맞으신가요?
이상술: 예, 거 부산에서.
노재명: 아, 부산에서.
이상술: 네.
노재명: 거긴 어떻게 알고 나가신 거세요?
이상술: 그러니까 내가 시조럴 해 가지고 뭐 어디 가서 그런 대회 가서 불러 보고 그런 적이 없거던. 근데 인자 부산서 그런 인자 명창들의 대회가 있다고 그래서 부산까장 갔제. 경창하러 갔어 거그서 1등을 했어요.
노재명: 그렇게 해서 63년도에 부산 시조 가곡 가사 경창대회에서 시조창 명창부 최고상 1등을 이제 하셨고 그렇게 해서 이제 완제 시조로는 아까 언급된 대로 60년대, 70년대서부터 이미 이상술 명인 하면은 최고의 대가로 이렇게 정평이 나셨는데 문화재로는 좀 뒤늦게 되셨어요. 1995년도에 인간문화재 지정이 되셨는데 좀 아쉬움도 있고 일찍 됐더라면 좀 보존이 더 잘 됐을 것 같고 이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이상술: 그러니까 인자 글 때 석암 선생이 시조로 문화재럴 받을라고 신청을 해 놓고 그랬거든. 근디 그것이 안돼. 긍개 영원히 안되고 나서사 구십오년도에 내가, 내가 인자 문화재가 되았제. 문화재 지정얼 너머 늦게 했어요 원체.
노재명: 예, 글쎄 말입니다. 선생님 성함은 이제 이미 60년대, 70년대에 완제 시조 최고 거장으로 이렇게 그 때 일찍부터 알려졌는데 저도 안타깝고 의아스러웠던 것이 90년대 들어서 95년도에 지정되신 거가 안타깝고 전승이나 보존에 좀 아쉬움으로 남고 그랬습니다. 국악 활동하시면서 그렇게 많은 제자도 양성하시고 음반, 사제를 털어서 재산을 탕진하시면서 음반도 취입하고 또 여러 소리, 판소리 북반주라든가 풍류 생활도 하시고 또 보급 활동도 많이 하셨는데 국악 활동하시면서 좀 가장 보람 있었던 거, 기억에 남는 가장 기뻤던 일은 어떤 일인지 궁금합니다.
이상술: 그렇든 저렇든 제일 보람이라는 것언 긍깨 부산에서 그 명창부 1등 헌 거. 글 땍에 제일 참 보람있고 뭐시기 했지요.
노재명: 그렇게 이제 그 당시는 아마 경연대회가 1회 대회였었고 처음 대회에 아마 열리는데 정말 그 때는 비리, 부정부패 없이 실력으로만 이렇게 뽑을 때니까 정말 실력으로 당당히 젊으셨을 때 1등 한 그 보람이 아마 컸던 것으로 그렇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완제 시조창의 예능보유자 이상술 명인과 함께 인터뷰 하고 있는데요 여기는 광주광역시의 시조창 전수소입니다. 여기서 이제 이상술 명인의 시조창을 한곡 준비해 봤습니다. 이번에는 시디 음반으로 제작을 직접 하셨던 그런 음반 속에 들어있는 음원입니다. 완제 사설시조 가운데 <잘있거라 내 강산아>, 이 곡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작사를 하고 이상술 명인이 작곡 해서 직접 독창으로 불러 주신 그런 음원입니다.
완제 사설시조, 김대중 옥중 작시 중 <잘있거라 내 강산아! 이제 가면 언제 올까. 잘있거라 내 강산아!>(작시:김대중, 노래:이상술) CD음반 녹음 방송.
노재명: 예, 이상술 명인의 작곡, 그리고 독창으로 완제 사설시조 <잘있거라 내 강산아>를 들어보셨는데요 이 곡은 ‘후광 김대중 옥중 작사’라는 음반에 들어있는 그런 시조창이었습니다. 이 곡은 어떻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작사를 이렇게 음반으로까지 작곡 해서 만들게 되셨는지 그 계기가 좀 궁금합니다.
이상술: 그 김대중 그 슨생께서 청주교도소에서 말하자면 망명얼 헐 땍에 그 작사헌 것인디 그 가사럴 누가 일본얼 가니까 그 가사가 있더래요. 그래서 그것얼 거기서 베껴다가 나럴 줘. 김대중 슨생이 이렇게 이렇게 했는디 이 놈얼 시조럴 헐 수가 없냐구. 이거 시조라고. 그래서 내가 완제 사설로 내가 편곡얼 했지요. 그래 가지고 글 땍에 그 땍에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으로 있었고 박지원이 그 땍에 저 문화관광부 장관이고 그래. 그래서 그 놈얼 해서 주면언 김대중 슨생한테 이렇게 들려 주고 이렇게 허먼 좋겄다, 그래 줬더니 그것이 들어갔는지 안들어갔는지 조차 시방까정 몰라요.
노재명: 예, 이상술 명인의 그 호가, 아호가 근촌이신데 이렇게 일평생 그 나주에서 성장하시고 광주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여기를 떠나지 않고 소박하게 이렇게 살고 계십니다. 여기 나주, 광주를 벗어나지 않고 이렇게 소박하게 그 서울 중앙무대 이렇게 막 좋은 그런 무대 보다는 여기서 이렇게 풍류객처럼 소박하게 사시는 어떤 그 생활의 소신이라고 그럴까 신념 같은 게 좀 특별하실 것 같은데 어떤 생활 신조를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이상술: 그니까 나는 어려서 부터서 그 농촌에서 농사럴 많이 짓기 따문에 뭐 배고픈지 모르고 돈 귀헌지 모르고 그렇게 살았어요 살기럴. 그래서 조부님 슬하에서 그저 내가 쓰고 싶으먼 돈 갖다 쓰고 그렇게 세상얼 내가 그렇게 살았어. 그래서 인자 이런 것도 하게 되고 인자 그랬는데 이것얼 허면서 부터서 인자 돈이 없어 가지고 많은 인자 고통얼 받었제. 그 전에넌 돈이 어떻게 생긴지럴 모르고 썼는디 돈이 떨어져 불고 나사 인자 돈이 이렇게 귀헌 것이다는 것얼 알게 되고 그랬어요. 근디 인자 돈 땀새 광주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생활. 그러자 대구에서 대구 사람덜이 대구로 오라고 나한테 인자 그래. 대구 와서 시조럴 갈쳐 도라. 그래서 그렇게 인자 승낙얼 허고 대구럴 가기로 했는데 그것얼 여그 광주 유지덜이 내가 대구로 간다는 것얼 알게 되았어. 근디 인자 바로 박인철씨라고 우리 광주의 아조 유지 되는 분 아니여? 그, 금호고속 박인철씨. 그 냥반이 나한티 와서 “그래 대구로 가기로 했냐”구. 그래서 “그랬다”고 그랑깨 “가지 마라, 여기서 니 거시기럴 보장얼 해 줄 것이니 절대 가지, 가지 마라.” 그래서 안가고 있었더니 그 냥반이 식량 같은 것얼 꼭 쌀얼 이렇게 갖다 주고 인자 그래. 그래서 박인철씨, 최태근씨 아조 유명헌 모다 분덜이 다섯, 여섯이 있어 박인철씨 이하 이하로. 이 분덜이 인자 아조 일찍허니 와서 나한티 시조럴 배와, 언제던지 아침에. 그렇게 시조럴 그 냥반덜이 나가 가르친깨 그 냥반덜이 인자 그렇게 쌀 같은 거 그런 인자 생활비럴 대 줘서 그렇게 인자 부지 허고 인자 살았지 광주에서. 그래서 이 광주에서 유지덜, 광주 유지 되는 분덜언 전부가 나한테 시조 안배운 분이 없어. 그렇게 시조 발전을 시켰어요 광주에서.
노재명: 그렇게 이제 많은 분들한테 시조창을 가르치시고 단소도 가르치시고 이렇게 풍류와 더불어서 일평생 보내셨고 지금도 이제 많이 가르치고 계신데 이 시조창을 가르치면서 특별히 강조하는 점, 어떻게 이 시조창을 불러야 된다, 어떤 정신을 가지고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거를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상술: 내가 선창을 허고 따라서 허라 허고 그것빼낀 수가 없어, 갈치는 교수 방법이. 뭐 다른, 다른 방법이 없어. 내가 허고 이렇게 따라서 허시오 허고 갈치는 법이 그것이에요.
노재명: 그래서 좀 잘 안되는 부분이 있거나 그래서 예전 어르신들은 이렇게 시조창을 가르쳐 주셨는데 요즘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하는 시조창이 좀 이렇게 약간 변화된 부분도 있고 그래서 시조창을 할 때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다 좀 이렇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강조하시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 부탁드릴께요.
이상술: 긍깨 인자 옛날에넌 이 시조 악보가 없었어. 그냥 구두로 입으로 그냥 이렇게 갈쳤는데 인제 지금언 악보가 있응개 그 악보 부호 그대로 부호럴 갈쳐요. 그니까 황태태황고중으로 돼 있거든, 도레미파솔라시도. 그렇게 해서 시방 가르쳐요. 그러니까 요새 젊은 사람덜이 그냥 이해럴 빨리 허고 인자 그래요. 그래서 갈치기가 워녀니 수월허고 정확허니 인자 시조가 되고 그래요.
노재명: 그러면은 석암 정경태 선생님도 시조 악보를 이렇게 개발해 가지고 그림도 그려 가면서 그렇게 책도 만드시고 그러셨는데 그러면 이상술 선생님도 그런 거 교본을 그렇게 따로 만드신 것들이 많이 있으신가요?
이상술: 그것이 따로 맨든 본은 없고 이 정경태 선생이 그 정간보럴 맨든 것이 나 하고 둘이 만든 것이야 합작해서. 정경태 선생이 혼자 단독으로 만든 것이 아니여. 나 하고 합작으로 해서 맨들아서 완제 시조럴 맨들아 논 거에요 시방 현재 악보가. 근디 시방 정경태 선생이 맨든 악보로 모다덜 알고 있는데 요새는 내가 그것얼 강조럴 하지요, 그건 나 하고 같이 맨든 것이다. 그리고 또 아까도 얘기 했지만은 완제 시조가 정경태 선생이 그렇게 능숙허덜 못했어. 나한테 배와 갖고 악보럴 맨들았어 나 하고 둘이. 그래서 이 악보가 나왔어요. 그렁깨 요새 인자 그 모다 제자덜한테 그것얼 내가 강조럴 허제. 이 완제 시조는 이상술이 내가 뭣이 헌 거제 정경태 석암 선생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인자 그런 것얼 내가 시방 강조럴 허고 있지요.
노재명: 예, 그러면 여기서 잠깐 이상술 선생님께서 석암 정경태 명인에게 평시조 완제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고 그게 나중에 악보로까지 나왔던 그런 작품을 잠깐 들어 보겠는데요 석암 정경태 명인이 이상술 선생님의 설명에 의해서 이렇게 완제 시조 악보도 만들고 직접 이제 녹음까지 하신 자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경태 명인의 평시조 완제창을 옛날 음반을 통해서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정경태 완제 평시조 <춘광이 구십일> CD음반 녹음 방송.
노재명: 석암 정경태 명인의 평시조 완제창이었습니다. 옛날 ‘한국의 전통음악’이라는 전집 음반 속에 들어있는 녹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제 완제 시조창을 악보나 가르침을 통해서 많이 보급도 하시고 또 음반으로도 제작을 하시고 공연 활동도 많이 하셨어요. 지금 팔십오세신데 앞으로도 이제 건강하신 동안 못다 이룬 꿈이라고 그럴까, 앞으로 국악을 어떻게 더 발전을 시켜야 되겠다, 또 시조창이 앞으로 완제가 더 좀 활발하게 전승이 됐으면 좋겠다, 이런 포부 계획을 좀 있으실 거 같애요.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상술: 그러니까 ‘근촌 이상술 선생 선양회’라고 허는 것이 있어요 선양회. 이걸 조직얼 해서 시방 올해 삼년찬가 매년 2회썩얼 선양회 회원덜얼 모여 놓고 내가 시조럴 강의럴 허지요 매년. 그러고 또한 스물댓명 이수자가 있어 문화재 이수자. 한 스물댓명 된디 또 이수자럴 또 이렇게 해서 가르치고 해서 끊임없이 시방 이 시조럴 가르치고 있어요. 그렁개 앞으로 완제 시조가 굉장히 대발전 허리라고 나는 확신을 허고 있지요. 내불둬 버리문은 안되지마는 내가 일년에 두 번썩얼 딱 모여 놓고 이렇게 이틀썩 강의럴 허고 가르치고 그래요. 그래서 인자 그것얼 경장히 희망으로 삼고 시방 그렇게 갈치고 있네요.
노재명: 예, 풍류 음악과 평생을 이렇게 함께 사셨고 느릿한 음악을 통해서 이 빠른 인생 속에서 좀 그래도 남들 보다는 멋스럽게 또 여유있게 이렇게 사시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봤는데 지금 85세까지 이렇게 국악을 즐기시면서 인생을 사시면서 좀 젊은 사람들에게 말씀해 주신다면 어떤 부분이 있을까요?
이상술: 그러니까 인자 사람이란 다 거시기가 틀리지마는 내가 생각할 때는 젊은 사람들이고 나이 묵은 사람들이고 이렇게 이런 국악얼, 이런 시조 음악 같은 것얼 좋아허게 되먼 자연히 다른 것도 다 따라서 다 좋아지게 마련이에요. 나쁜 생각이 안들어가. 악헌 생각이 없어지고 그래 인자 이런 시조 같은 것얼 많이 허고 그러면언 좋을 것이다. 그러니깨 내가 그 전에 저 ‘얼씨구 학당’(광주 MBC-TV 방송)에서 내가 그런 말얼 했지요. 요새 사람덜언 무대에서 기냥 뛰고 궁글고 그냥 재주를 넘고 인자 그렇게덜 허는데 가만히 앉어서 시조럴 부르는 사람덜은 시조럴 부르면은 얼마나 점잖허고 착하게 뵈냐. 근디 그냥 이 놈의 세상이 이러니깨 그냥 그 무대에서 그냥 막 춤얼 추고 뛰고 궁글고 그런 것언 그렇게 좋게 안보이더라는 것얼 내가 그런 얘기럴 헌 바가 있어요. 근디 지금도 시조럴 허고 허면언 사람덜이 워녀니 침착해지고 유독히 운전기사덜이 이런 음악을 허고 시조럴 허면언 속도 위반도 안허고 그럴 거요.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더러 운전기사덜한테 시조럴 배우라고 그 소리럴 내가 많이 허지요. 시조럴 배우면언 마음이 우선 차분해 가지고 과속얼 안허고 그런다는 얘기럴 내가 늘 하지요.
노재명: 예, 어느덧 마칠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구요 그렇게 말씀해 주신 대로 저희들도 이제 운전을 하든 길을 가든 좀 더 여유있게 그렇게 인생을 보내면 어떨까 생각을 해 봤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게 이렇게 좋은 음악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랜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이상술: 예, 장시간 동안 말도 질서 없는 말얼 많이 헌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 여하튼 늙었다고 시조럴 포기하지 말고 늙었어도 늙은 그 순간 시조로서 여생을 이렇게 즐겨 보시고 시조덜얼 배왔으문 좋겄습니다. 이상입니다.
노재명: 네, 감사합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광주광역시 완제 시조창 인간문화재 이상술 명인과 함께 했습니다. 다음주에는 순천의 삼설양굿 인간문화재 박경자 명인과 함께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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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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