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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 사자놀음 인간문화재 이근화선 명인 증언 내용
  ikhsps.jpg (사이즈:43.6KBy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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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1970년대 이근화선 명인 일행 북청 사자놀음 기념 단체사진, 이근화선 명인 승무 사진.
2011년 4월 7일 서울시 강남구 삼성2동 112-1 무형문화재전수회관 7층 북청 사자놀음 전수소에서
국악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방송 진행:노재명) 북청 사자놀음 보존회장 이근화선 명인 현장녹음 장면.
이근화선(창) 조성현ㆍ김유진(퉁소) 함경도 민요 <애원성> 즉석 현장 녹음 모습.
아래 우측 사진은 왼쪽부터 차례로 강선윤, 이경난, 이근화선 명인, 노재명 방송 기념 사진.
* 2011.4.7.14:00~18:00.북청 사자놀음 전수소에서 노재명이 이근화선 명인을 인터뷰하고 2011.4.9.19:30~21:00.국악FM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진행:노재명)에 방송된 내용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신 이근화선 명인께 깊이 감사드립니다.(2011.5.17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명인실에 발표)

북청 사자놀음 인간문화재 이근화선 명인 증언 내용
대담ㆍ채록/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안녕하십니까. 노재명입니다. 오늘도 통일 한국을 꿈꾸며 이북의 고향을 그리며 살고 있는 실향민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통일 될 그 날을 위해 현재 북한 현지에서도 거의 전승이 끊어진 이북의 향토 문화예술을 이 곳 남한에서 지키고 보존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원로 명인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중에서도 함경남도 북청에서 전승되었던 사자놀이 분야의 원로 인간문화재 이근화선 명인에 대한 방송을 마련했습니다. 예전 이북 지역의 민속음악과 춤, 인간문화재 명인의 피땀어린 노력, 실향민 여러분들의 애환, 통일 한국에 대해 다 함께 생각해 보는 그런 뜻 깊은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인간문화재 이근화선 명인을 만나기 위해서 국악방송 중계차가 여기 서울 삼성동의 북청 사자놀음 전수소를 찾았습니다. 이근화선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근화선: 안녕하세요.
노재명: 예, 평소 굉장히 부지런하시고 분주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이근화선: 건강은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노재명: 평소에 인제 사자놀음 그 연희 현장에서는 자주 뵐 수가 있었는데 이렇게 음악 방송에서 라디오로 인터뷰 방송되기는 아마 드문 그런 기회인 것 같습니다. 아 그래서 인제 평소에 청취자 여러분들이나 국악 애호가 분들이 궁금해 하실 만한 그런 내용을 좀 중심으로 해서 여쭐까 합니다. 굉장히 이렇게 정정하시고 미인이시고 아주 허리도 안굽으시구 단정하신데 연세가 올해 어떻게 되시는지 좀 여쭙겠습니다.
이근화선: 87세에요.
노재명: 그러면 생년월일이 음력으로 어떻게 되시나요?
이근화선: 생년월일이 그러니깐 내 호적에는 24년으로 됐어요. 아, 그거는 우리 인제 이북에서 나온 사람은 가호적을 하거덩. 그러니까 그거 쪼끔 어긋나 가지구 25년 생인데 24년 생으로 돼 있거든요. 그니까 지금 호적에 24년 생으로 돼 있어요. 24년 생이면 88세거든요. 그니깐 호적에는 그렇게 돼 있어요. 네.
노재명: 그러면 원래 소띠가 맞으시는 겁니까? 쥐띠가 아니라, 아 원래는 1925년 생이 맞으시구요?
이근화선: 예, 예. 그러나 호적대로 그냥 전부 다 써 먹는 거지.
노재명: 그러고 인제 선생님에 대한 신문 기사, 또 여러 가지 자료를 제가 그 동안 수집한 거를 여기 다 가져 왔는데 그 옛날 신문에 이렇게 보니까 이름이 길면 장수한다고 해서 선생님 성함을 이렇게 넉자로 길게 지었다 이런 신문 기사가 있는데 선생님 작명에 대한 사연이 있으면 좀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아 그게 아니구 우리 부모가 처음에 낳아서 지은 것이 넉자 이름이에요. 뿌리 ‘근’(根)자, 꽃 ‘화’(花)자, 착할 ‘선’(善)자. 아 인제 이렇게 이름을 처음에 짓기를 그렇게 지었소. 명이 긴다고 해서 한 게 아니구.
노재명: 아 그러면 그 ‘근’자, ‘화’자, ‘선’자 쓰시는 성함은 본명이 맞으시구요?
이근화선: 맞습니다.
노재명: 그러고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북청 지방을 일제시대 때 아마 돌아 보셨나 봐요. 그 분 그 일기에 보면은 “북청은 가는 곳마다 글을 읽는 소리가 들려 오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독립이 된 후에 북청을 모델로 해서 우리나라를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고 싶다.” 이런 글을 인제 남기기도 하셨는데 그 함경남도 북청은 인제 예로부터 물장수가 유명하고 그 다음에 자녀 교육에 대한 열성이 아주 높았다고 그래요. 그래서 어린 시절 보내셨던 그 북청 지역에 대해서 좀 어떤 마을이었는지 회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예, 북청 물장사는 인제 우리 마을의 우리 이씨 아들덜을 공부시킨다고 인제 서울 와 가지고 이재옥이 부친 하고 이천진이 부친 하고 서울에 와서 인제 물장사를 하면서 자식덜 제국대학을 마쳤어요. 그래서 유명하지. 그러고 우리 북청이라는 곳은 암만 살기가 어려와서두 자식덜 다 공부 가리켜요. 그건 아주 특수해요. 그런 거 있시요. 네.
노재명: 실제 북청의 물 맛은 굉장히 좋았었던 거죠?
이근화선: 그렇죠. 물 맛 좋고 그냥 그 거기는 쌀도 여기 여기 서울, 이쪽 쌀 하고 북청 쌀 하고 달라요. 거기 쌀은 기름지구 아주 그냥 밥을 해 놓으면 기름이 조르르 흐르구 아주 그 고소하고 그래요. 여기 쌀 하고 틀려요.
노재명: 북청 사자놀음이 유명한 마을인데 남도 분들 말씀에 의하면은 판소리의 경우도 전라도에서 판소리를 배워서 경상도에서 그거를 풀어서 이제 유명해지고 마지막에는 함경도에서 이름을 떨쳐야 비로소 판소리 명창이다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마만큼 함경남도 북청이라든지 그런 함경도 지역이 풍류가 가득했던 그런 지역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근화선: 예, 거기는 인제 이 예술 같은 거 받들이고 모든 사람덜이 북청 사자놀이 부텀두 아주 굉장히 그냥 아주 발전을 하고 아주 열심히 모두 온 그 동네 마을 사람들이 다 거기 이제 신경 기울여 가지구 열심히 잘해 가지구 아주 특수한 놀이가 됐죠. 정월 대보름 날 아주 그냥 그 큰 대동놀이루 했던 거죠.
노재명: 예, 그 정월 대보름에 이제 그 마을 분들이 몇 백명씩 모여 가지고 횃불을 들고 그 사자가 운수대통도 시켜 주는 그런 영물이고 또 액운도 이제 물리쳐 준다 해서 그런 놀음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축제가 서로 사이 좋게 즐겁게 지냈던 그 우리나라의 인정과 풍류가 물씬 넘치는 그런 문화가 아닌가 생각을 해 보는데 특히 어린 시절에 보셨던 그 북청 사자놀음의 굉장히 구성진 어떤 아름다움이라고 그럴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좀 상세하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예, 그러니까 이제 내가 이제 네 살, 다섯 살 그때 인제 우리 오빠랑 모도 인제 사자놀이 이제 마을 청년들은, 젊은 사람들은 다 그 사자놀이 이제 준비하고 연습하고 모두 이러는데 이제 내가 이제 거기 따라 나가 가지고 이제 무동을 했었어요 처음에. 근데 여기는 무동이지만 이북에서는 산대춤이라 그랬거든요. 그래서 산대춤을 이제 추러 어깨 위에 올리 놓으니까 아주 너무 잘 춰 가지구 아주 그냥 호평이 많았어요. 그래 가지구 계속 이제 무동하고 열두살까지 인제 산대춤을 추고 그 대음에 이제 사당 고사도 하고 이제 또 더 커지니깐 승무두 하구 뭐 여러 가지 했지요. 하다가 이제 시집을 가게 됐지.
노재명: 그러면 그 때 네 살 때면은 굉장히 어린이라고 그럴까 아기 같은 그런 굉장히 연소할 땐데 그때 그 사자 위에 올라 가고 그러면은 무섭지가 않고 재밌으시던가요?
이근화선: 그러니까. 예, 그 무서운 것도 모르고 그냥 잘해 왔다는 게 나도 신기해요. 하하하하하.
노재명: 그래서 일설에는 이제 북청 사자놀음을 정월 대보름에 안하게 되면은 그 해에 그 마을에 젊은 분들이 대다수가 돌아가셨다라든가 뭐 그런 일도 있었다고 그러는데 오히려 인제 이렇게 북청 사자놀음을 하면 무병장수하고 그랬다. 그래서 아마 이근화선 선생님께서 네 살 때부터 지금까지 팔십 몇 년 동안을 이 사자와 함께 이렇게 지내시다 보니까 이렇게 지금 얼굴 뵙는 것처럼 굉장히 정정하시고 장수하시는 거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예, 그래서 그 북청 사자놀음 그거 하실 때 이제 뭐 사자춤만 한 게 아니고 부녀자들 나오셔 갖고 애원성춤이랄지 사당춤, 거사춤 이렇게 무동춤, 꼽추춤 다양한 춤이 나왔는데 또 그러면서 저기 <돈돌날이>라든가 함경도 민요가 불려졌지요. 그래서 특별히 가능하시면 그 당시에 불려졌던 함경도 민요를 하나 좀 부탁드릴까 하는데요 혹시 그 함경도 민요로 유명한 <신고산타령>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근화선: 예, 그 가사를 좀 잊어 먹어 가지고 될라는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원래 노래 하던 사람이 아니 돼 가지고 옛날에 쪼끔 노래 했는데 이 오십년, 육십년이 넘으니까 그 노래가 그 목소리 안나오더라고. 그래서 좀 힘들기는 하지.
노재명: 예, 그러면 그 이근화선 선생님의 소리와 제자 되는 이경난씨의 장고 반주로 함경도 민요 <신고산타령>, <어랑타령>이라고도 하는데 그 함경도 민요를 한번 듣고 다음 얘기 이어 가겠습니다.
이근화선: 하하, 가사가, 가사를 잊어 버려 가지고 아 내 그냥 아는 것 만큼 쪼끔만 할께요.
노재명: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창) 이경난(장고) 함경도 민요 <신고산타령> 즉석 현장 녹음.
이근화선: 가사를 잊어 버려 가지구.
노재명: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근화선: 하하하, 노래를 통 안해 놓으니까.
노재명: 네, 청취자 여러분들이 아마 평소에 놀이마당이라든가 방송, 텔레비전 방송에서 이근화선 선생님의 사당춤이랄지 그 북청 사자놀음과 관련된 춤을 많이 보셨을텐데 아마 이런 민요는 처음 오늘 들어보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굉장히 즉석에서 이렇게 불러 주셨는데 감사합니다. 그 북청에서 이렇게 이남, 월남 하신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북청군 신창면 토성리에 사시던 분도 계시고 이제 북청군 중에서도 여러 마을에서 이쪽 남한으로 내려 오셨는데 이근화선 선생님께서는 그 고향 주소지가 구체적으로 어디신가요?
이근화선: 고향이 이제 북청군의 신북청면이라고 있소.
노재명: 신북청면, 네.
이근화선: 예, 그래 가지고 신북청면의 안곡이라는 데 평촌 마을에 살았어요. 그래 거기는 인제 우리 이씨만 한 칠백호 살았소. 우리 이씨만. 그래 가지고 우리 이씨만의 북청 사자놀이를 이거를 했든 거에요. 근데 타선이 인제 거 좀 멀리 떨어져서 타선이 있는데 타선에는 사자놀이를 안하고 우리 이씨만 사자놀이를 했어요. 그래 가지고 아주 굉장히 그냥, 동네에 그냥 청년덜은 다 모여서 그걸 하고 그 다음에 아낙네덜은 <돈돌날이> 그걸 또 그냥 그렇게 명절날이면 하구 아주 대단하게 모두 그 놀이를 좋아해 가지구 하하하. 열심히 잘했죠.
노재명: 그러면 그 신북청면 안곡 평촌 마을이 아마 단양 이씨의 그 집성촌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제 다 같은 천척, 친지 집안이니까 이제 뭐 남녀노소 같이 어울려서 뭐 놀아도 흠 될 것이 없는 거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이근화선: 네, 그래요. 이제 그 평촌 마을에 하평촌, 상평촌, 이제 웃봉마을에, 아랫봉마을에 이렇게 됐고 사해마을에, 승지마을에, 양지마을에, 이렇게 모두 무송거리 이렇게 동네의 이름이. 개울 건너로 해서 이름이 달라져. 그게 다 우리 이씨야. 그래서 인제 남자 여자 이제 옛날엔 섞어 놓으면은 굉장히 이제 말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거는 한 우리 종씨덜이니까 막 합해 섞어서 그냥 놀아도 아무 뭐 그냥 뭐 숭이 없었어요 옛날에. 예, 그런 게 이제 특수해. 음.
노재명: 기록에 의하면은 부친 되시는 분이 이시춘씨, 모친께서 주쌍가마씨. 그 사이에서 3남매 중에 막내로 태어나셨고 위에 오빠 하고 언니가 계시고 그 오빠가 북청 사자놀음에 아주.
이근화선: 네, 이공진이라고.
노재명: 이공진씨요.
이근화선: 예, 이공진씨.
노재명: 아주 북청 사자놀음의 명수였던 걸로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근화선: 양반을 하고 그랬어요.
노재명: 아 예, 양반 역할이요. 그러면은 그 때 지방 어른들이 대거 이 북청 사자놀음 할 때 그런 역할들을 분담해서 많이 하셨나 보죠?
이근화선: 예.
노재명: 이근화선 선생님께서 네, 다섯 살 때는 산대춤이라고 하는 무동춤도 추시고 그렇게 하시다가 점점 클수록 역할이 이제 늘어났을 것 같은데요.
이근화선: 늘어났죠. 다 늘어났죠.
노재명: 네, 사당춤이랄지 이제 여러 가지 춤을 추셨을 텐데.
이근화선: 네, 거사춤, 사당춤, 승무도 하고 그냥 그 애원성이라는 춤도 추고.
노재명: 네, 그러면 이제 남자들이 담당했던 사자춤 빼 놓고는 거의 다 역할을 해 보셨겠네요?
이근화선: 네.
노재명: 그 다음에 그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하면은 북청의 사자가 마을마다 좀 모양이 탈 모양이 조금씩 달랐던 것 같고 그 다음에 암사자 하고 숫사자 이 탈 모양도 조금 달랐다고 그래요.
이근화선: 네, 쪼끔 털이가 쪼끔 달랐지만 그 사자는 비슷했는데 털이를 쪼끔 변동시킨 거지.
노재명: 아, 털.
이근화선: 암사자, 숫사자 해 가지고 이제 이 모래기라는 거 모래기를 인제 색깔을 달르게 이렇게 해 가지고 암사자, 숫사자 해 가지고. 이제 제일 처음에 인제 사자놀이를 인제 정월 대보름날 그 대보름 전날 열나흣날, 십사일날 그 날부텀 사자놀이를 시작하는 거에요. 시작을 하면은 이제 그 우리 고향에 하면은 이제 그 갯지모로산이라고 있소. 갯지모로산이라고 인제 있는데 그 산이 아주 엄청 길어. 높으구 긴데 정월 대보름날 인제 동네 마을에 그냥 그 사람들 거기 다 집합을 해. 집합을 해 가지고 그 횃불놀이를 해. 횃불을 전부 다 들구 그 다음에 그냥 북, 징, 꽹가리 그냥 다 제금 뭐 해서 이제 들고 퉁소 해서 그 산으로 인제 삥 도는 거에요. 그 횃불놀일 하면서 사자까지 해서 가 가지고 거 끝에 가면은 그 산 끝에 가면 모래밭이 있어. 개울 거기서 사자춤을 싸우는 거야. 막 사자춤을 싸우다가 인제 이긴 쪽이 한다 해 가지고 막 싸우다가 그래 가지구 그 대음에 끝내구서 인제 터밭골에, 넓은 그 터밭골에 모닥불 피워 놓고 사방에 모닥불 피워 놓고 그러구서 거기서 인제 사자놀이를 하는 거에요 밤을 새우고. 그 한쪽에서 뭐 술두 먹고 먹어 가메 그냥 사자놀이를 밤 새고 하는 거에요. 그래 인제 그거 밤 새고 이게 하던 놀이, 놀인데 문화재청에서는 지끔 40분만 하라는 거요. 그러기 땜에 우리가 신나다가 그냥 끝나는 거에요 40분을 하면. 40분을 하니까 한창 시작하다가 그냥 끊어, 끊어지지. 그러니까 신나지도 못하구 에, 그 좋은 장면을 못보는 거지. 근데 그냥 단체가 많으니까 40분을 그냥 결정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 왔지요. 해 왔는데 인제 거 밤 새고 놀고 아침에는 인제 집집마다 대보름날 인제 집집마다 인제 한 바쿠씩 돌아서 인제 그 집에 잡귀 다 몰고 편안해지라고 해서 이제 집집마다 댕기면서 사자가 다 돌아 가지고 이제 부엌 문으로 나오면서 그 집 손자를 또 태운다고 손자 이제 무병장수하라구. 태워 가지구 그 집 마당을 삥 돌아가면서 사자가 그냥 막 이래 놀고 그냥 그렇게 하면 그 집에서 이제 쌀이고 그냥 돈이고 막 퍼 주는 거요, 이제 기분이 좋아 가지고 인제 집안을 좋게 했다고 해 가지고. 에, 그래 가지고 인제 그 쌀 하구 돈을 가지고 마을에 인제 사자도 맨들고 그 대음에 인제 그 못살아 가지고 공부 가리키기 어려운 집 장학금을 해 주구 그 다음에 인제 그 못사는 집에 보태 주구 그렇게 해 왔어요. 그러니깐 옛날에두 거 새마을 그런 뜻으루 이제 한 거 같애요. 에, 그렇게 해 왔거든요. 예.
노재명: 예, 그 함경도에서는 그렇게 대보름을 보내고 전라남도, 또 동해안 지역에서도 이제 대보름이 되면은 그렇게 마을 축제를 열고 했는데 그런 인정 있는 그런 모습들이 복지 제도가 없었던 당시에 서로 이렇게 도우면서 살았던 그런 훈훈한 풍경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해서 인제 사자가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을 걷어서 이제 어려운 사람 도와주구 교육도 시켰다고 하셨는데 그 교육으로 유명한 북청에서 특별히 그 자녀 교육이라든가 젊은 사람들한테 훈도할 때 좀 중요하게 가르쳤던 덕목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근화선: 음, 그러니깐 인제 북청이라는 데는 없이 살았어도 자식 공부 가리키는 거는 아주 특수하게. 배고픈 사람도 다 자식은 공부만 가리키는 데 아주 전력을 했어요. 그래서 북청 사람이라 하면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다 배워 배웠기 때민에. 그게 이제 특수해요, 북청에는 어려와도. 네.
노재명: 예, 그리구 이제 굉장히 성실하고 알뜰하고 아주 근면했던 분들인 거 같은데 선생님께서도 평소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시고 일찍 많은 일을 하시죠?
이근화선: 그렇죠. 에, 우리가 인제 먼저 번엔 땅에 인제 좀 넓은 데 살았는데 거긴 뭐 별의 별 거 다 심어 가지고 새벽 다섯시면 일어나서 그거 가꾸고 그냥 아주 그냥 부지런하게 한다고 해서 방송국에서랑 그렇게 뭐 막 와서 찍어 가고 막 그랬어요. 에, 하도 부지런하게 한다 그래 가지고 새벽에 일어나 또 체조 하고 막 운동을 하구 그러고 그 뭐 심어 가지고 열심히 인제 키우구 이런 거를 한다고 해 가지고 아 많이들 찍으러 오드라구 그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북청 사자놀음 분야의 인간문화재 이근화선 명인과 방송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북청 사자놀음은 1967년에 한국의 중요한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그 예능보유자로 사자 앞채 역에 윤영춘씨, 사자 역할에 김수석씨, 또 변영호씨가 악사를 했었구요 동성영씨가 또 사자 역할, 여재성씨가 사자 뒷채 역할, 또 전중식씨가 악사, 전광석씨가 칼춤, 그리고 이근화선 명인이 사당춤 역할로 인간문화재로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함께 문화재로 지정되신 분들을 북청에서도 익히 잘 아셨던 분들인가요?
이근화선: 에, 그러니깐 북청에서는 동네가 다르기 땜에 전중식씨 이런 분들은 우리 동네에서 한 이십리 가야지 있었어요. 그러니깐 고향선 못봤지요. 못보고 여기 나와서 인제 연락에 연락, 북청에서 인제 에 사자놀이를 하던 사람덜을 찾어 가지구 에 그래 가지구 저 부산에두 있구 뭐 전라도에도 있구 인천에도 있구 모두 있는 사람을 하나 하나 찾어 가지구 그래서 집합시켜 가지구 처음에 시작을 핸 게 열다섯 명이 인제 시작을 한 거에요. 그래 시작을 인제 하다가 그 대음에 차차차차차 인제 더 많이 집합이 돼 가지구 인원이 이제 이삼십 명씩 되고 그렇게 됐어요.
노재명: 예, 그 말씀 듣기로는 전중식씨 지금 언급해 주신 그 분이 퉁소랄지 또.
이근화선: 아주 잘 불었죠. 아주 엄청 잘 불었어 그이가.
노재명: 아, 그리고 색소폰이나 피아노, 이런 다른 악기도 잘하셨다고.
이근화선: 네, 그것도 잘했어요 그 분이.
노재명: 네. 음악성이 아주 뛰어났던 분인 거 같습니다.
이근화선: 예, 그래서 아버지한테 쫓기났다구 집에서. 그런 것만 하고 에 즉, 뭐 어디 좋은 자리 직장을 들어가든가 뭐 어떻게 그러지 않구 딴따라 그런 거 한다구 옛날에 노인네덜이 그랬잖아요. 네, 그런 거 한다구 해서 집에서 쫓기나 가지구 저 만주에 가 가지구 거 색시폰 계속 불어 가지고 그때 옛날에 일제시대 월급으로 오만원인가 옛날에 받았대는 거에요. 그때 오만원이면 엄청난 큰 돈이라고 그러더라고. 그렇게 아주 그이는 잘했어요.
노재명: 그 전중식씨 그 제자분이 또 잘하셨는데 일찍 돌아가셨다고 말씀 들었습니다.
이근화선: 예, 그 제자분이 아버지 하구 같이 댕기메 퉁소를 아주 열심히 잘했거든요. 아부지 하구 똑같게 불었어요. 에, 그랬는데 갑자기 그냥 죽게 돼 가지구서는 세상 떠났어요.
노재명: 예, 전중식씨 말구도 또 퉁소 잘 부는 분들이 북청에 많았을 거 같은데.
이근화선: 많았어요. 많지요.
노재명: 예, 혹시 기억에 남는 고향 분들이 누가 있을까요?
이근화선: 그러니까 그 변영호씨가 그이도 퉁소를 불었어요. 그 저기 여기 나와서는 양반도 하고 그랬지만 고향서는 퉁소를 했거든요, 저 변영호씨. 그 다음에 김영곤이라고 그분도 퉁소 잘 불었지요 옛날에. 예, 퉁소 부는 분들이 한 열명은 됐을 거에요. 네, 근데 이름을 지금 또 생각이 안나네.
노재명: 예, 지금 여기 전수소에 이렇게 벽면을 쫙 보게 되면 에, 사자탈이라든지 악기가 진열이 되어 있고 또 예전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의 사진이 이렇게 잘 걸려 있습니다. 아마 지금 언급해 주신 그런 분들이 이 중에 사진으로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 사자놀음 분야의 원로 이근화선 선생님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지금 방금 언급해 주신 그런 퉁소가 담겨있는 그런 북청 사자놀음 음악을 한번 준비를 해 봤습니다. 북청 사자놀음 보존회 분들의 예전 녹음 자료인데 <사당곡>을 우선 한번 들어보고 다음 얘기 또 이어가겠습니다.
북청 사자놀음 보존회 합주 <사당곡> 녹음.
노재명: 네, 예전에 녹음된 북청 사자놀음 보존회 여러분들의 연주로 북청 사자놀음 중에서 <사당곡> 들어 보셨습니다. 전해지는 그런 기록에 의하면은 단오, 한식, 추석 이런 때 대보름 말고도 이렇게 뜻깊은 날이 있으면 모여서 <돈돌날이>를 부르고 그렇게 흥겹게 북청 분들이 노셨던 것 같은데 예전에는 북청 사자놀음을 대보름 전날서부터 놀기 시작해서 1박 2일 밤새워서 그렇게 다음 날까지 놀고 또 예전에는 환갑 잔치나 결혼식도 며칠씩, 장례식도 며칠씩 하고 그랬잖습니까?
이근화선: 예.
노재명: 그러면은 여기 오셔 갖고 무형문화재 제도가 40분으로 이렇게 줄여서 해야 된다 이런 요구도 있었고 또 여기서 실향민 여러분들 하고 어울리시다 보면은 <돈돌날이>라든가 사자놀음을 또 하실 기회가 있으실 텐데 여기 인제 점점 아마 고향 분들이 줄어드시고 아무래도 예전 같지가 않고 좀 축소되어서 이렇게 놀게 되실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떻게 여기 분들하고 어울리시는지 궁금합니다.
이근화선: 지금은 인제 제자덜이 주로 인제 주역할을 대부분이 하고 나는 아직까지 춤은 좀 추긴 추지만 그 전 같이 역할을 세 개, 네 개를 역할을 하던 거 에, 그냥 넋두리춤이라는 거 하나만 하고 다 제자덜이 그냥 다 하고 있어요. 예, 뭐 애원성에서부터 그냥 사당, 거사니 뭐 승무니 다 제자덜이 하고 있어요.
노재명: 스무살 때 혼인하시고 남편 되시는 분께서 서울에서 사업을 하시니까 서울에 오셔서 아주 금슬 좋게 몇 년 사시다가 이제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고 그래요. 그래서 피난길에 남편 되시는 분을 그 난리통에 인제 이별하게 되셨다고 하는데 그 당시 사연을 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아 그러니까 인제 에, 우리가 인제 종로5가에서 살았거든요. 에, 종로5가에서 살다가 1.4 후퇴할 때가 돼서 6.25 때는 피난을 안나가고 종로5가에 그냥 살다가 1.4 후퇴가 인제 돼 가지구는 피난 안나가고는 안되겠드라구. 동네 빨갱이들이 막 일어나서서 살 수가 없어. 그냥 쌀이구 뭐구 다 뺏어 가고 그냥 뭐 그냥 사람들 괴롭혀서 막 끄집어 내다가 총살 시키구 그냥 막 동네 빨갱이들이 거 못살던 사람들이 전부 빨갱이가 된 거여. 에, 그래 가지구 살 수가 없어 가지구 피난을 나가야 되겠고 해서 피난 나가는데 종로5가, 동대문시장 입구에다가 인제 그 이제 추럭을 인제 에, 시워 놓구 인제 부산까지 태워다 준다구 해 가지고 그니까 수 백명이지. 그냥 인천항구에 나갈라구 아, 그래서 인제 추럭을 인제 애 둘 데리고 우리 아들은 돌쨉이구 그래 가지구 딸은 한 세 살, 그래 가지구 인제 에, 추럭에 올래 탔는데 남편 하고 다 인제 추럭에 탔어요. 탔는데 거기서 너무 사람 많으니까 애 하고 엄마 하고만 먼저 그 추럭이 인제 인천항구로 나가고 에, 남자덜은 다음 차에 나가라고 해 가지구 남자덜이 그 추럭에 탔던 게 다 내맀소. 내려구서는 인제 에, 인천항구로 애 둘을 업구 인제 데리구 인제 그 다른 사람들 다 거 가뜩 인제 추럭에 타 가지구 인천항구를 갔소. 가 가지구 창고에서 일주일을 기달렸소. 그래도 남편이 안오는 거야.
노재명: 예.
이근화선: 그러니까 남편들이 다 안오는 거지. 그니까 보국대로 다 보냈는지 보냈길래 안오는 거지. 안오는데 일주일만에 인천 바닥에 쌀 낱가래가 그냥 수 백개 있는 걸 다 폭격해서 태우고 불바다를 맨들어 놓구 마지막 배가 떠나는 거를 인제 우리가 타구서 그냥 안갈 수가 없어 마지막 배가 떠나니까. 근데 배가 얼마나 큰지 이 저기 자동차를 수 백대를 실어. 그 배에다가 그 자동차 속에 우리가 모두 타는 거에요. 그래 가지고 타 가지구 인제 부산으로 인제 출발하는데 아 그걸 글쎄 부산을 가는데 짐 보따리 못실어 가지구 애 둘 가지구 남자가 없으니까 그 짐 보따리 실을 수가 없어 가지구 남자들 보구 붙들구 막 짐 보따리 실어 달라구 막 울구 그러니까 거 실어 줬어요. 그게 이제 돈이야. 우리 남편이 인제 그 동대문시장에서 큰 상업을 했거든요. 그래서 돈을 이불에다 쌌어. 이불에다 싸 가지구서는 그거를 그 보따리를 인제 그러는데 사람들이 이게 뭐냐 기래. 쌀이라고 그랬어 돈이라고 안하고. 그 때는 십원짜리 지전 그냥 그거에요 돈이. 그거를 이불에다가 싸 가지고 그냥 묵어 가지구 이 남자들이 그냥 밧줄 매 가지고 여섯 사람이 끌어 올려서 배에다가 실었어 그거. 실어 가지구 부산까지 가지구 갔어요 그거를.
노재명: 예.
이근화선: 예, 가지구 가 가지구 그걸 인제 해군 창고에 인제 가서 인제 한달이나 해군 창고에서 그냥 거 그때 눈보래 치고 1.4 후퇴 때 12월 달에 막 눈보래 치고 엄청 추워 가지고 그냥 애들이 그냥 소변 보고두 그냥 그 쉬 소리도 못하고 그냥 추우니까 그냥 쏘구 막 그랬어요. 그래 가지구 애들이 그냥 몸이 그냥 막 헐구 막 그래 가지구 그 때 페니시린이라는 그런 약, 주사약을 인제 서울서 군품을 사다가 사 가지구 내리가서 그걸 병원에 가서 주사를 몇 번 놓으니까 다 낫아요. 그때 그렇게 그 페니시린이란 거 주사가 아주 유명하게 좋았어요. 그래 가지구 낫아 가지구 방을 얻어 가지구 나가서 이제 살게 되면서 지물포에 가서 인제 종이 사서 밖에 쪽에 풀을 써서 가지구 부산 시내에 인제 그 담벼락이고 전봇대에다가 우리 남편이 찾어 오라구 전부 붙이구 댕겼어. 애를 업구 그냥 댕겼는데 남편은 안찾어 오구 친척덜이 이북에서 온 거야. 에, 배 타고 모두 그냥 피난 모두 나와 가지구 피난민 수용소에 모두 들어 가고 인제.
노재명: 예.
이근화선: 그래 내가 인제 영도섬에 살았다구. 영도섬에 인제 살았는데 에, 우리 시숙네랑 그 영도섬에 피난민 수용소에 모두 있구 모두. 그래 가지구 이제 거기 있다가 학고방을 하나 지어 가지구 거기서 이제 애 둘 데리구 살다가 이 서울 사람이 이제 와 가지구 에, 나를 취직하래요. 그래 미군 부대 취직하래서 이제 취직을 했소. 근데 이 꼬마덜을 그냥 저이들끼리 놀구 그냥 취직을 해 가지구 인제 하는데 아니 이 아들놈이 그 저 학질에 걸려 가지고 그냥 설사 하고 막 그냥 거품똥 누고 그래 가지고 아 우리 시숙이 막 야단치는 거야. 직장 집어 치우고 그냥 애들 키워야 된다고 애 다 죽게 됐다고 난리 쳐 가지고 그래 직장 고만두구서 인제 애를 인제 병원 댕기면서 곤치 가지구. 그런데 또 우리 친정 또 그 저 조카니 사춘이니 육촌이니 와 가지구 범일동에다가 이제 자기네 지금 피난 나와서 산다고 나를 거 범일동으로 오라는 거야. 그니까 내가 돈 있는 줄 알아 가지구 그 돈 이용할라구. 가자 그러는 거 내가 처음에는 안들었더니 별 놈의 그냥 소리 다 해 가지구 집두 지어 놨다구 해 가지구 범일동에 가서 또 학고방 지어 가지구 오라 해서 갔소. 거기 가서 이제 애들 데리구 인제 사는데 아니 이거 묵호에 가서 낙지를 그냥 에, 사다가 팔면 된다고 인제 날 보고 동업을 하자고 해서 이 돈을 내가 또 내 줬소. 그랬더니 미군 부대에서 깡통 그 저기 그거를 해 가지구 씨아이디에다가 걸려 가지구 그래 가지구 돈은 다 날라간 거야. 아, 그래 가지구 그냥 돈이 많으니까 동네 피난민들도 그냥 그 뭐 장사하는 데 다 빌리 주구 그냥 그러니까 내가 장사할 줄두 모르구 그냥 애들 데리구 아무 것도 할 줄 몰르잖아요 그냥. 친척두 잘 살지 남편이 잘 벌어 들이지 하니까 그렇게 편안하게 살다가 거기 가서 그렇게 되니까.
노재명: 예.
이근화선: 그러다가 그냥 거기서 3년 있다가 인제 서울 올라 와서 남편이 그 하던 상업 장소에서 에, 장사를 했소. 그 장사를 아주 크게 아주 동대문시장에서 아주 했는데 그 가게가 큰 개 몇 개씩 되니까 물건은 그냥 그 막 대줘요 그냥. 그 장사를 인제 열심히 인제 해 가지고 아주 잘 하다가 아 5도청에서 와 가지고 날 보고 북청 사자놀이를 하래는 거여. 에, 그래 가지구 처음에 못간다구 하니까 아, 이 장사 때민에 그 남의 사람을 백명도 더 쓰고 있으니까. 제품 공장도 있지 그냥 천 짜는 공장도 크게 이렇게 하니까 못나간다 하니까 5도청에서 거 매일 와서 그냥 날 데리 갈라고 그냥 사정을 하는 거여, 이 사자놀이 살리야 된다고. 그래 가지고 을지로2가에 이제 거 5도청이 있었소 그때. 그런데 그 지하에다가 그냥 해 가지고 사자놀이를 인제 연습을 하고 그래서 내가 거 그렇게 갔어. 에, 가 가지고 인제 그걸 처음에 가서 쪼끔만 하고 온다고 했는데 그게 안되더라고. 그래 가지구 열심히 인제 거기서 하다가 손 띨 수가 없는 거야 그냥 들어가니까 할 사람이 없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여잔 나 하나밖에 없어 가지고 사방에서 여자덜 친척덜을 불러다가 그냥 시작을 그 시키구 모두 이래 해 가지고 그 대음에는 이제 내가 거기 전력하게 되니까 에, 그냥 의상이고 그냥 뭐, 뭐이고 준비 다 내 돈으로 다 사자놀이 그 전부 다 맨들어 가지구 그래 가지구 시작을 했어요. 그 발표 공연도 하고 그냥 전국 대회도 나가고 인제 차차 인제 하게 돼서 그 사자놀이에 부도를 내뻐린 거야. 그러니까 남의 사람들만 전부 썼으니까 에, 속이 먹구 그냥 도둑질 해 먹구 모두 이래 가지구는 이, 부도를 내, 홀딱 내버렸지. 그렇게 부도 나구서는 에, 내가 인제 종합병원에 인제 씰어져 가지고 종합병원에 가서 석달이나 입원을 했어. 있는데 이 사자놀이 사람덜이 그냥 신문 한 장 가지구 왔드라구. 음 신문 가지고 와 가지구 날 보고 빨리 일어나라고 인제 낫어서 일어나라구 하면서 그 신문 보여 주면서 신문 한 장이 내 사진이 났소. 으, 인간문화재라구 인제 이렇게 사진이 난 거 가지구 이제는 이, 이거를 일어나서 빨리 인제 낫어서 일어나서 이거 활동해서 사자놀이를 꾸려 가라구 말이야 열심히 해 줘야 되겠다고 해 가지고 그래 인제 낫아 가지고 그 다음에 이제 사자놀이를 전력을 해 가지구 이 우리 인제 전국을 댕기면서 중고등, 대학을 다 공연을 내가 인제 전부 그냥 섭외를 봐 가지구 그래서 해 가지고 백오십 군데, 일년에 백오십 군데를 이렇게 공연을 하면서 그래서 사자놀이가 인제 끈을 쥐기 시작한 거에요. 예, 그래서 모두 인제 공연을 사방에 댕기메 회원들 데리구 댕기면서 해 가지고 차차차차 그냥 에, 회원들도 쪼금씩 인제 도움이 되고 우리 회에도 도움이 되고 해서 큰 일을 그 때 핸 일이 있어요. 예.
노재명: 예. 지금 이제 말씀해 주신 내용이 스무살 때 결혼하셨을 때부터 이제 피난 가시고 남편 이별하시고 사업에 성공하시고 부도 나시고 북청 사자놀음을 살리신 것까지 소설책 거의 한 세 권 분량을 짧게 압축해서 말씀을 해 주신 건데 참 이게 눈물 겨운 얘깁니다. 그래서 그 때 6.25 때 남편과 이별하시고서 지금까지 못만나셨는데 아마 그 몇 년 신혼 생활 하실 때 금슬이 굉장히 좋으셨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그 때 그 너무 금슬이 좋으셔서,
이근화선: 예.
노재명: 지금까지 그 재혼도 안하시고 그 때 그 모습이 지금도 아마 그리우신 것 같습니다. 남편을 생각하면 감회가 어떠신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예. 그러니까 에, 우리 남편에는 그 때 내가 들어오구서 무슨 사업이던지 너무 잘 된다구 에, 복덩어리 들어왔다구 우리 시집의 전체가 아주 대인기 됐어요. 아주 그냥 무얼 해두 그냥 잘 된대는 거여. 그러구 그냥 시집 집안에서 아주 미인이 들어왔다구. 그러면서 그러니까 내가 결혼 한 날 결혼식이 네 개 있었는데 제일 이쁘구 뭐 제일 잘 들어왔다고. 호호호호호. 그러니까 젊었으니까 이뻐 봤겠지. 그래 가지구 아주 우리 시아버지 삼형젠데 둘째 시아버지가 가마 앞에서 춤을 추고 막 그랬, 그랬대요. 아, 그래서 아주 그 집안에 이제 메느리덜 중에 제일 좋아하구 인제 그래, 그랬대요. 하하하하하하하.
노재명: 예. 그러면은 그 때 이제 남편분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고 그 이상 남자분들은 지금까지 전혀 눈에 안차시던가요?
이근화선: 예. 아, 중매도 엄청나게 많이 들어왔어요. 중매도 엄청 많이 들어왔는데 우리 애덜 자체가 그 중매쟁이 오면 싫어해. 엄마 뺏기는 줄 알구. 싫어하기도 하지만 나는 사업이 바뻐 가지구 천 짜는 공장두 세 개야. 카라 있는 거, 무지 뭐 이렇게 해 가지구. 이 천 짜는 공장두 세 개 되지, 제품 공장 있지, 가게가 세 개지, 사람을 백명 이상 썼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장사가 잘 되니까 이 짐을 니주꾸리 묶어서 거 지방에 모두 보내는 걸 두 사람이 전속해 했다구. 크게 크게 장사를 했어요. 그래 가지구 바뻐 가지구 그레다가 그렇게 바쁜 데다가 또 5도청에서 사자놀이를 해래지 이러니깐 뭐 바뻐 가지구 어디 뭐 중매구 뭐이구 그냥 뭐 그런 걸 영등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고 그런 거 다 구찮게 생각했지. 예, 그랬기 땜에 곌혼을 뭐 한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를 않았지.
노재명: 예. 그렇게 이제 바쁘게 사업도 하시고 북청 사자놀음 고향의 그 민속을 살려야 되겠다 해서 이근화선 선생님이 그렇게 사업이 크게 번창하다가 부도가 날 정도로 이제 북청 사자놀음에 전력을 다 하시고 그 본인의 집에 다 그, 예전 그런 이제 악사나 명인들을 모셔서 다 같이 이제 연습도 하시고 이랬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아마도 부지런하고 단결력 있고 전통문화에 대해서 중요하게 인식했던 여기 이근화선 명인을 비롯한 북청 여러분들의 힘이 모아져서 그러한 귀중한 사자놀음 예술이 오늘날까지 전승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훈훈한 인정 넘치고 멋을 알고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북청 여러분들의 토속민요를 준비해 봤습니다. 이 곡을 듣고 다음 얘기 이어가겠습니다. 1968년에 함경남도 북청 출신의 실향민들이 이렇게 모여서 노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 녹음된 자료입니다. 고기섭, 김어금씨가 녹음한 함경도 민요 <돈돌날이>입니다.
고기섭, 김어금 함경도 민요 <돈돌날이>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서울 삼성동의 북청 사자놀음 전수소에서 인간문화재 이근화선 명인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방금 들으신 음악은 1968년에 함경남도 북청 출신의 고기섭, 김어금씨가 녹음한 함경도 민요 <돈돌날이>였습니다. 정월 대보름에 북청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사자놀음도 하고 이렇게 <돈돌날이>를 많이 부르고 놀았다고 말씀 들었습니다. 그 가사 중에 그 예전에 <돈돌날이> 부녀자들이 이렇게 부르실 때 ‘왜놈들 내쫓고 우리가 차지하자. 왜놈들 나가고 우리가 해방된다’ 이런 가사 때문에 그런 거를 막 삽입해서 부르니까 이런 노래, 이런 놀이가 금지됐다고 그런 말씀을 들었는데 그런 회고담을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예. 그니까 <돈돌날이>라는 이 노래 속에는 이제 ‘왜놈들 내쫓고 우리 해방 된다’ 하는 이러한 가사가 거기 많이 댐겨 있거든요. 그래서 그 왜정 때 에, 이걸 금지시켰어요. 못하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저기, 그리구 음력 설을 못쇠게 방앗간에도 그냥 지키 서고 떡을 못하게 하구 막 그냥 엄청난 아주 그냥 그 왜놈덜이 그냥 지장을 많이 줬죠. 그래두, 그래두 했어요. 그렇게 그 놈들이 그냥 뭐 방맹이 들구 칼 들구 휘둘러두 그래두 얼마나 극성 맞았는지 그걸 했대니깐요. 중단을 안하고 했소. 그 명절 날이면 인제 아낙네덜이 모여서 <돈돌날이>를 이제 하고 또 이 정월 대보름 날만 한 것도 아니고 사자놀이럴 에, 뭐 설 때두 사자놀이를 하고 그냥 뭐 명절 때면 이 사자놀이를 하고 에, 또 인제 이 단오, 단오 때두 거 사자놀이두 하구 씨름두 하구 그네두 뛰구 에, 이런 걸 다 하구. 에, 그 대음에 한식이라고 있거든요 한식 다음 날, 다음 날은 남대천이라고 있소. 우리 이 신북청면이 그 남대천이라고 있는데 그 이 한식 다음 날에는 남대천에서 <돈돌날이> 그걸 에, 각 동네 그냥 뭐 동네마다 다 거기 집합하는 거야 남대천 밑에. 철다리가 이렇게, 남대천 철다리가 있는데 그 밑에 전부 집합하는 거야. 북청 사람덜이, 여자덜이, 아낙네덜이 집합해 가지구 무동이니 그냥 뭐 춤을 추고 그냥 엄청난 놀이를 해요. 에, 그래 한식이면 아주 엄청 크게 아주 잘했지요. 에, 그런 게 있소.
노재명: 예, 지금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하지 말라고 막 그렇게 탄압을 일본 사람들이 해도 그 저항 정신을 가지고 <돈돌날이>를 그렇게 부르시고 마을 주민들이. 또 독립운동도 하시고 또 김구, 백범 선생님께서 그 북청을 돌아 보고 그렇게 그 드높은 교육열에 감탄하시고 또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학구적인 데다가 멋도 알고 풍류가 있어서 사자놀음도 추고 또 이렇게 이근화선 선생님께서 여러분들 고향 분들과 함께 그런 정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북청 사자놀음도 오늘날까지 복원하고 전승을 하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북청 사자놀음이 그렇게 해서 이제 부흥이 되고 이근화선 선생님이라든가 인간문화재 선생님들 중심이 돼서 학교를 비롯해 사방으로 강습을 많이 하셨는데 이근화선 선생님의 뒤를 잇는 제자 분들로 어떤 분들이 계신지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예, 강선윤이라고 지끔 현재 에, 전수조교, 조교루 돼 있고,
노재명: 예, 강선윤 씨.
이근화선: 예, 강선윤. 전수조교고 또 여기 이경난이라고 또 인제 아까 여기 장고 인제, 이경난이는 아직 전수조교는 안돼고 이수잔데 곧 이제 뭐 전수조교 될 거에요. 근데 장고, 북 이거 아주 엄청 잘하구 있어요. 에, 그 대음에 이제 김순의라구 우리 손녀딸이 춤으로는 아주 그냥 아주 춤에 대해서는 엄청 잘하지요.
노재명: 예, 그럼 여기서 잠깐 이근화선 명인의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제자인 강선윤 씨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근화선 명인이 어떤 분인지 말씀을 듣고 다음 순서 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강선윤 선생님! 현재 북청 사자놀음 보존회의 전수조교로 활동 중이신데요 이근화선 선생님께 북청 사자놀음 등 어떤 부분을 배우고 계신지요?
강선윤: 예, 사당도 배웠고 거사도 하고 승무도 하고. 제 전공은 인제 꼽추춤이거든요. 무용 부분은 다 배우고 있습니다.
노재명: 그 어떤 계기가 있으셔 가지고 선생님한테 배우게 되셨는지요?
강선윤: 제가 그 학교를 예술학교를 나왔거든요. 네, 그래서 인제 처음에 저희 선배님들이 여기에 활동을 하셨고 선배님들의 권유로 인제 학교에서 단체적으로 왔었어요 처음에. 지금은 두명 남고 다 중도에 탈락을 했죠.
노재명: 그 이근화선 선생님한테 그렇게 배울 때 아마 그 탈락이 많이 됐다는 거는 좀 배울 때 어려운 점이 있었던 건가요?
강선윤: 그렇죠. 어렵기도 하거니와 단시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보면은 이거는 끈기를 가지고 길게 시간을 요하고 음 그렇기 때문에 인제 활동을 하다 보면은 여기에 전력으로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또 다른 또 활동을 하다 보니까 그런 데에서 좀 어려운 점이 있어서 중도에 탈락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재명: 그 이근화선 선생님의 가르침 중에서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강선윤: 선생님은 항상 그 애원성 부분을 상당히 중요시 하고 계시고 또 그 중에서 이제 넋두리라는 춤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제 무슨 춤이냐면 북청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춤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물론 선생님이 사당춤을 하고 계시지만 그 북청의 그 춤이라고 하면은 대표적인 게 이 넋두리춤이에요. 그래서 넋두리춤에 대해서 상당히 강조를 하시고 넋두리춤은 아 이런 춤이다, 또 서민들의 춤, 고런 식으로 항상 그 넋두리춤에 애착을 가지고 계시고 애원성은 젊으셨을 때에 남편을 잃으셔서 그런지 그 애원성춤 추시는 걸 보면 상당히 그 애처롭다는 그런 느낌도 받고 또 평생 그 한이 그 춤에 고스란히 녹아 내려져 있는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저희가. 그래서 그 애원성춤과 넋두리춤, 사당춤 이런 거에 묘한 분위기가 나타나요. 선생님이 춤을 추실 때는 그 인생이 녹아있다고 할까요. 네, 그걸 또 전수받을려고 노력을 합니다. 근데 그게 뜻대로 잘 안돼서 그렇지.
노재명: 예, 끝으로 이제 선생님이자 보존회 회장님이신 그 이근화선 선생님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그런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선윤: 선생님이 그 1년, 1년 가실 때마다 막 이렇게 기력이 약해지시는 모습이 보여요. 많이 참 안타까운데 저희 제자 된 입장에서는 참 마땅히 뭐를 해 드릴 수도 없고 그래서 항상 그 마음이 아려지는데 그 선생님이 항상 그 말씀 하시는 게 아침에 일어나면 건강이, 운동을 참 많이 하신다고 항상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그런 운동을 좀 하시면서 오래도록 저희 지주 역할을 해 주시고 북청 사자놀이를 위해서 90세, 100세까지 그냥 건강하게 사셨으면 하는 그런 바램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늘 함께 다니시면서 함께 즐겼으면 하는 그런 마음 항상 있습니다.
노재명: 감사합니다.
강선윤: 네, 감사합니다.
노재명: 다음은 제자 이경난씨의 인터뷰를 통해서 스승인 이근화선 명인이 어떤 분인지 말씀 듣고 다음 얘기 또 이어가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이경난 선생님!
이경난: 안녕하세요.
노재명: 예, 이근화선 명인의 제자로서 북청 사자놀음 보존에 힘쓰고 계신데요 이근화선 명인은 어떻게 처음 알게 되셨는지요?
이경난: 이근화선 선생님은, 저도 북청 출신이에요. 저희 아버님이 북청 출신이어서 같은 안곡이시구 신북청에 계시는데, 제가 인제 어려서 무용도 하고 했는데 저희 아버님 아시는 전광석 선생님이 북청 사자놀이가 있다. 그러니까 와서 여기서 우리 북청 사자놀이를 잘 전승하고 배워서 공연도 하고 좋겠다 이렇게 얘기 하셔 가지고 아버님이 또 가서 열심히 해라 우리 북청 거구. 아버님두 북청에서 사자춤두 추시구 꼽추춤두 다 추시고 하셨대요. 그런데 여기 와서 못하시다가 북청 사자 공연하는 걸 보시고 또 그 전광석 선생님이 또 동생분이세요. 이근화선 선생님도 멀리 친척분 되시구요. 그래서 처음에 북청 사자 오니까 이근화선 선생님이 여자 선생님은 딱 혼자서 열심히 이렇게 가르켜 주시고 열심히 하고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사당도 배우고 승무도 배우고.
노재명: 예, 아버님 성함이 혹시 어떻게 되시는지요?
이경난: ‘이’자, ‘장’자, ‘영’자 되세요.
노재명: 예. 부친께서 아마 이거를 배우게끔 하신 거가 아마 고향에 대한 그리움, 나중에라도 통일이 되면 딸이 이렇게 그 고향 땅에 가서 덩실덩실 이런 고향의 춤을 추어 주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그 이근화선 명인이 평소 강조하시는 점, 선생님의 그 멋있는 점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경난: 어, 우리 선생님은 춤으로 평생을 지켜 오시면서 특히 애원성이라든지 춤들을 엄청 멋있으면서도 우아하고 무용을 했던 사람들도 따라서 흉내내기가 좀 어려운 춤이세요. 그리고 이북 춤이 손 아래로 내려오는 춤이 아니고 항상 어깨 위에서 춤을 춰야 되요. 그래서 그게 좀 힘든데 그것이 일반 고전무용이나 무용 했던 사람들은 와서 또 다시 배워야 되요. 근데 그것을 너무 우아하게 잘 하시고 그래서 저희들한테도 자상하게 잘 가르켜 주시고 항상 이 무용, 일반 무용이랑 틀리니까 우리 전통 이북 춤을 잘 전승, 계승해야 된다 그렇게 해주셔서 너무 좋으세요.
노재명: 함경도 춤사위가 그 굉장히 기운이 넘치면서도 굉장히 자연미가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이근화선 선생님이 이렇게 춤을 지도하실 때 춤사위가 어때야 된다라든가 발디딤이 어때야 된다라든가 이렇게 강조하시는 점이 있으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경난: 발은 사뿐사뿐 이렇게 미끄러지듯이 춤을 춰야 된다 그렇게 그걸 항상 강조하시구요. 춤은 이북 춤이니까 항상 꺾는 거를 잘 꺾으면서 어깨 위에서 항상 부드럽게 이렇게 우아하게 자연스럽게 잘 춰야 된다. 그걸 강조하세요.
노재명: 끝으로 북청 사자놀음의 발전을 위한 다짐, 그렇게 잘 열심히 배워서 통일 되면 북청에 가서 아버지 대신으로 내가 한번 덩실 춤을 춰 보겠다라든가 또 이근화선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그런 말씀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경난: 통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구요. 또 이북에 가서 우리 북청 사자놀이가 공연을 하면서 우리 북청 축제고 연희고 하니까 이북에서 정말 신명나게 우리 북청 사자놀이도 하고 그리고 우리 선생님, 회장님은요 항상 변함 없이 우리 북청 사자를 지켜 주셨고 가장 어르신으로서 잘 이끌어 가시고 계세요. 그래서 저희들이 더 잘 이어받아서 잘 발전하고 잘 계승해서 잘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생님 만수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셔서 지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재명: 예, 오늘 장고도 쳐 주시고 이렇게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경난: 감사합니다.
노재명: 예, 제자 이경난 씨의 인터뷰를 통해서 바라본 이근화선 명인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이근화선 명인께서도 제자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아마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북청 사자놀음의 전승 등에 관련해서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그런 제자들에 대한 당부의 말씀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네, 여태까지 이제 내가 아, 열심히 인제 제자덜 키우메 열심히 그냥 북청 사자놀이를 지키 오면서 음, 발전을 하고 모든 걸 그 제자덜한테 인제 바라는 것은 우리 북청 사자놀이를 앞으로 정말로 원형으로 음, 열심히 잘 해가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서울 삼성동의 북청 사자놀음 전수소에서 인간문화재 이근화선 명인과 함께 방송하고 있습니다. 북청 사자놀음 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잊혀지지 않는 기뻤던 그런 순간, 어떤 일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는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예, 기억에 이제 남는 거는 우리가 인제 처음에 그 5도청에서 와서 데리간 그 기억이 내가 하하. 그렇게 하는 바램에 내 사업두 그냥 정리해고 그 기억이 지금까지두 남어있고 그래 가지구 이제 앞으로는 내가 사업이라는 거는 할 수 없다 하는 걸, 그대루 내 했으문 인간문화재는 안됐을 거지만 에, 사는 거는 부자루 잘 살았을 것이다. 인제 이런 생각을 이제 해보는데 그래두 인제 우리 회원 전체가 그래도 명예래두 가지구 있으니 잘 됐지 않느냐구 이런 사람두 있기는 하지요. 그래 나두 그거는 좋게는 생각하지만 내 그 큰 사업을 다 엎어졌다는 것이 에, 아쉽게 생각해요 지금까지.
노재명: 그렇게 이제 온재산과 온정열을 다 바쳐서 북청 사자놀음을 되살리시고 오늘날 북청 사자놀음 보존회 회장으로서 전승에 아주 맹렬하게 힘을 쏟고 계십니다. 음, 대동강 물을 먹지 않으면 서도소리의 깊은 맛을 낼 수 없다 이런 말이 있듯이 가능하다면 북청 출신 분들에게 이 사자놀음이나 <돈돌날이> 같은 민요를 가르쳐 주면 전승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저도 한 20여년 전에 이제 여재성 명인이랄지 이런 분들과 교류하면서 북한에서 탈북하신 분들한테 이러한 예능을 어떻게 이어 볼까 해서 좀 가교 역할을 해보려고 시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이제 워낙 남북 관계가 이렇게 대치되는 상황이다 보니까 쉽지가 않더라구요. 지금도 아마 그게 실현만 된다면 좋겠는데 여전히 아마 그 탈북자나 관계자들한테 이러한 이북의 민속예술을 여기서 가르친다는 게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주로 가르치시는 대상은 어떤 분들이고 그 전승이 순탄하신지 그런 상황을 좀 말씀 여쭙겠습니다.
이근화선: 예, 지금 이제 가리키고 있는데 이 북청 사람 만큼 할 수가 없어요. 그러고 북청 사람들은 공부에만 아주 그냥 그 열중을 하기 땜에 자식들을 이렇게 이런 데 민속을 이렇게 잘 안시킬라 그래요. 그래도 북청 사람덜이 있기는 있어요. 있디만 많이 없고 어, 이남 사람덜이 더 많아요. 예, 그런 인제 애로점이 있어요. 그래서 원칙은 북청 사람이 많아야 된다 하지만 북청 사람 생각이지 보통 우리가 보존회를 생각할 적에는 북청 사람만 가지곤 할 수가 없어요. 그래 가지고 지금 여기 이남 사람덜 대부분이 더 많이 인제 전승시키구 이제 오는 거에요.
노재명: 네, 북청 사자놀음을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아주 오랫동안 전력을 다 하셨고 고향의 그 문화예술을 이제 되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힘써 오셨는데 아마도 그 갈 수 없는 고향 북청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셨나 이런 생각들을 해봅니다. 그 북청 사자놀음의 우수한 점, 약 한 83년 동안 이 사자놀음에 헌신해 오셨는데 이 북청 사자놀음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그럴까, 가장 그 멋있는 점은 무엇일까요?
이근화선: 그러니까 북청 사자놀이라 하면 사자. 인제 사자가 그 모래기를 탁탁 치구 이제 그 뭔가 아주 욕망스럽게 그게 이제 큰 매력이지요. 그, 그게 이제 사자놀이 인제 제일 인제 큰 역할이지. 거 아주 기운있게 아주 욕망스럽게 하는 것이 아주 보기가 좋구 관중에서 볼 때도 그걸 잘해야 되니깐 에, 말하자문 사자놀이를 잘 할라문 모래길 잘 쳐야 되구 기운있게 해야 되고 인제 이게 제일 특징이구. 에, 그래서 사자놀이를 할라면은 엄청 이제 연습두 해야 되고 배우는 것도 제대로 배워야 되고 에, 잘못 놀면 저거 북청 사자 아니다. 이럴 수가 있으니까 에, 고런 점이 인제 아주 특수하지요.
노재명: 네, 그간 6.25 한국전쟁 등 파란만장한 그 곡절도 겪으시면서 북청 사자놀음 전승에 오랫동안 힘 쓰시고 그래서 1966년에 이북 5도청의 공로패, 통일부 장관상 수상. 그리고 북청 사자놀음 그 해외 초청 공연, 두루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다소 좀 아쉬웠다, 좀 후회되는 점이 있다 그런 부분이 혹시 있으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에, 아쉬웁다면은 이제 우리 인제 북청 사자놀이를 엮어 가는데 사자가 좀 힘들거든요, 어렵거든요. 그래서 사자를 할 사람이 많이 안들어 와 가지구 에, 거기에 항상 신경 쓰구 많은 걱정을 하구 있지요. 에, 사자 할 사람이 많이 없어 가지구. 그러고 몇 명이 있드래두 직장 가구 뭐 인제 이래서 평일에는 인제 어렵구 이런 문제가 좀 인제 아쉽구 힘들어요 좀. 그래서 좀 이 사자놀이 할 사람덜이 좀 많이 좀 들어와서 전승을 많이 시켰으면 아주 흐뭇하겠어요.
노재명: 지금 이제 방송 들으시는 청취자 분들 중에서 혹시 이 북청 사자놀음에 관심이 있는 분은 서울 삼성동의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이 있는데 그 7층에 북청 사자놀음 보존회에 연락을 주시면 지금 인간문화재 이근화선 명인께서 안타까워 하듯이 그 사자 역할을 좀 할 만한 그런 젊은이들이 좀 많이 연락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방금 언급해 주신 것처럼 북청 사자놀음, 북청의 민속예술의 특징이 아주 기세등등하고 그 대륙의 기마 민족의 기개가 느껴지는 그런 기운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돈돌날이>랄지, 그 함경도 민요에 그 노래에도 그런 특징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함경도 민요가 어떤 그런 맛이랄까, 멋이 있는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함경도 민요는 그냥 그 아까 말하다시피 그 ‘왜놈덜 내쫓는다’는 이런 인제 그러한 에, 가사가 이제 많이 들어가 있고 그 다음에 인제 그 <애원성>이라는 인제 이런 노래는 인제 남편덜을 보국대에 내보내 놓구 왜정 때 아주 그 남편을 다시 못볼 것 같애 가지구 애원을 하는 이러한 노래이구 그래 가지구 그 노래 자체가 에, 너무 인제 그 감격에 인제 넘치는 이러한 노래덜입니다. 그래서 에, 참 이걸 보존을 잘해서 앞으로두 그냥 먼 세월을 두고 에, 보존 잘해 주기를 우리 후배덜이 에, 항상 부탁하고 있습니다.
노재명: 본래 북청 사자놀음 중에서 춤 분야의 인간문화재 명인이신데 오늘 라디오 방송 녹음이라 무용은 직접 이제 지금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보지 못하시니까요 이 시간에 특별히 평소 접할 수 없었던 이근화선 명인의 색다른 측면으로 함경도 민요 가운데 <애원성>을 좀 부탁드려 볼까 합니다. 조성현, 김유진씨의 퉁소 반주로 감상해 보시겠습니다.
이근화선(창) 조성현ㆍ김유진(퉁소) 함경도 민요 <애원성> 즉석 현장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서울 북청 사자놀음 전수소에서 이근화선 명인과 함께 인터뷰 방송을 하고 있는데요. 방금 들으신 곡은 이근화선 명인께서 즉석에서 불러 주신 함경도 민요 <애원성>이었습니다. 퉁소 반주에는 북청 사자놀음 보존회 회원이신 조성현씨, 김유진씨가 담당하셨습니다. 평소 듣기 어려웠던 아주 귀한 음악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이라 이근화선 명인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춤은 보여 드리지 못하지만 이처럼 의외의 특별한 곡도 감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일주일 내내 북청 사자놀음에 대해서 그 동안 모은 자료도 다시 꺼내서 보고 그렇게 사자놀음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해 왔는데 문득 이근화선 명인을 오늘 뵈니까 평소에 여가 생활을 어떻게 보내실지, 사자놀음 외의 다른 취미는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이근화선: 사자놀이 외에는 에, 내가 거 밤나 생각하고 어떻게 이거 운영을 하고 어떻게 이거 전승을 하느냐 이런 인제 고민, 이런 연구, 아 이런 거를 생각을 하다 보니까 다른 거는 그렇게 많이 생각을 못하고 내 이제 건강을 유지해야 된다 이제 첫째. 에, 우리 회원 전체가 이 회장 이근화선 건강하는 게 제일 아주 응, 첫째 문제라구 지금 건강하긴 하지만 앞으로두 계속 건강하라는 거 그 부탁이 우리 회원덜 전체의 부탁이 그겁니다. 그래서 내가 건강을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이제 조심하지요. 예, 그런 거 있어요. 그러고 인제 우리 북청 사자놀이럴 앞날에 있어서 내가 만약에 세상 떠나더래도 북청 사자놀이는 아주 그 먼 세상을 나가면서 아주 그 발전을 하고 많은 그냥 우리 회원덜이 잘 모두 이어져서 해 오기를 부탁하는 겁니다.
노재명: 예, 지금 올해 연세가 87세신데 말씀도 젊은 사람처럼 아주 또박또박하시고 그 다음에 피부라든지 이 눈동자가 아주 젊은이 같으신데 평소에 그 건강 관리 비결이랄지 음식이나 뭐 운동 같은 거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예, 나는 뭐 음식두 가려 먹는 것도 없구 다른 거는 없는데 내가 인제 건강을 생각해서 운동을 많이 해요. 인제 아침에 이제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1시간씩 운동 열심히 아주 하고 있어요. 젊어서부텀 여태까지 하루도 빠진 일이 없어요. 저 지방 공연 가두 새벽에 더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꼭 하고 가는 거에요. 에, 거 지방 공연 가서 거기서 인제 에, 자게 돼두 내가 인제 혼자 운동을 하고, 하고 있지요. 에, 아주 운동으로는 내가 아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노재명: 예, 그리구 아마 덧붙여서 인상이 이렇게 항상 웃으시는 그런 인상이시라 아마 건강하시고 장수하시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청춘 시절도 있으셨고 또 만남과 이별도 있었고 또 성공과 좌절도 있으셨는데 지금 이렇게 87세로 건강하게 살고 계신데 젊은 시절 회고해 보면은 지금 노년에 생각했을 때 과연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라는 걸 한번 정의를 해 보신다면 그 젊은 사람들한테 어떻게 말씀을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근화선: 예, 인생이라는 거는 자기 나름대루 자기가 살기, 살민서 모든 걸 에, 자기가 하기 탓이거든요. 자기가 인제 건강을 지킨대든가 모든 걸 에, 앞으로에 있어서두 첫째 건강이 제일이니까 건강하면은 안될 수가 없다, 하면 된다, 에 이러한 정신을 가지구 으 여태까지 걸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모든 걸 그렇게 누구 보담두 건강을 지킬라구 아주 열심히 노력하구 있어요.
노재명: 이제 끝으로 소원이라고 할까, 앞으로의 계획 좀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근화선: 예, 계획으론 우리 인제, 내 생활보다 우리 북청 사자놀이, 크다란 우리 북청 사자놀이가 앞으로 더 커지구 더 발전하구 더 훌륭해지기를 해외에두 많이 나가구 우리 회원두 많이 들어와서 열심히, 열심히 전승을 해서 아주 앞으로 발전이 아주 크다랗게 잘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어느덧 마칠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중요한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북청 사자놀음 중에서 사당춤의 예능보유자 이근화선 명인과 함께 했는데요 네 살 무렵부터 북청 사자놀음에 입문해서 약 84년째 이렇게 한 분야에 헌신한 인간문화재 명인의 말씀을 통해서 새삼 통일 한국을 더욱 염원하게 되고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전승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고향 북청의 그 사자놀음을 되살리고 현재도 왕성하게 전승하고 계신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 긴 시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이근화선: 감사합니다.
노재명: 예, 항상 건강하십시요 선생님.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다음주에는 완제 시조 인간문화재 이상술 명인과 함께 하겠습니다. 이상술 명인에 대해 궁금한 점 있으시면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홈페이지 “예인에게 전한다”에 남겨 주시면 제작에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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