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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노재명 저서 [명창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본 판소리 참모습](서울:나라음악큰잔치 추진위원회, 2006년) 137~143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충청도 공주 중고제 판소리 거장 김석창과 그 일가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천하 명창 이동백이 동시대에 활약한 소리꾼 중에서 극찬한 판소리 대가는 박기홍, 그리고 충청도 공주 중고제 거장 김석창을 꼽을 수 있다.
정노식 저서 [조선창극사] 175쪽을 보면 김석창 명창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김석창(金碩昌) - 중고제
김석창은 충청도 인(人)이니 고순(高純) 양대간에 안이리(아니리)와 부침새로 고명하였고 춘향가에 장하였더라. 동배로 이동백, 김창룡은 말이 이에 미치매 탄복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이 [조선창극사]에는 김석창과 이동백이 동배로 표현되어 있는데 국악인들의 증언 등으로 봐서 김석창이 이동백(1866년 출생)보다 약간 연상인 듯하다.
박동진의 말에 따르면 명창 김석창은 공주 무릉동에서 100리 넘게 떨어진 진산, 지금의 금산군 사람이고 박동진이 살던 진잠에서도 살았다. 김석창은 춤 명인 김숙자의 종조부이며 아니리 잘하고 풍채도 좋았고 특히 각도 마부, 말, 사투리가 다양하게 나오는 춘향가 중 <신연맞이> 마부타령을 잘했다. 박동진이 부르는 말 사설이 바로 이 김석창제라고 한다. 김석창은 이동백, 송만갑의 대선배라 한다.(1999.8.19 박동진 증언)
김석창의 후손 이산용의 증언을 감안해 보면 김석창은 1890년대 후반~1900년 무렵에 작고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석창은 한국 음반이 왕성하게 제작되기 이전에 타계하여 녹음을 남기지 못했고 그래서 현재로서는 그의 기량을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이동백을 비롯한 근대 5명창보다 한수 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석창의 후손들은 판소리, 무속음악, 전통춤 등의 활동을 하였는데 전통춤 인간문화재 김숙자가 바로 김석창 명창의 손녀이다. 다음은 김숙자 일가에 대한 한 기록을 옮긴 것이다.(‘살풀이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년 제작. 행정간행물 등록번호:28800-86822-57-9805, 1VHS, 조사·정리·해설서 집필:이병옥·서승우, 이 비디오테입의 부록 책자 86~89쪽 기록 발췌)
“김숙자는 1927년 11월 27일(병인생)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 곡천리에서 김덕순씨의 6남매 중 다섯째로 출생하였다. 김씨는 예술에 소질을 보여 6세 때 부친으로부터 직접 춤을 전수받았다.
부친은 제자 양성에만 전념한 청빈한 예술가였으며, 늘 김씨에게도 ‘예술가는 등이 추워야 진정한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김씨의 조부도 우리나라 대명창인 충남 공주 출신의 김석창씨였다.
김씨의 부친은 정화(幀畵)도 잘 그렸다 하니 말하자면 김씨는 선천적으로 예술가의 소질을 이어받을 큰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씨의 나이 7세부터 입춤(기본 살풀이춤)을 출 정도로 재주가 놀라왔으며, 부친께서는 그 외에도 국악 전반에 걸쳐 가르쳐 주셨다.
무속 양반무인 터벌림춤, 진쇠춤, 부정놀이춤, 올림채춤, 쌍군웅춤, 그리고 승무, 태평무, 한량무, 판소리 5마당, 신선무, 가야금병창 등을 가르쳐 주셨다. 김숙자 나이 14세 때에 그녀의 이름은 경기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춤과 창을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부친은 집 뒤에 토굴을 파서 춤을 가르치다가 들켜 부친과 함께 유치장에 잡혀 들어갔다. 시말서를 15차례나 썼는데, 김씨는 일주일만에 풀려 나오고 부친은 상투를 잘리어 보름만에 출옥하였다.
그 날 부친은 저녁에 집마당을 싸리비로 깨끗이 쓸고 상위에 정수를 떠놓고 제를 올리고 주머니에서 상투를 꺼내어 불을 사르고 물에 띄운 후에 양식을 조금 챙겨 김씨를 데리고 집을 떠나 청음사 위에 토굴을 파놓고 김씨를 공부시켰다.
김숙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도 그때 배운 것이다. 양식이 모자라서 죽을 조금씩 쑤었는데 이것을 부친이 잡수시게 하기 위해서 김씨는 항상 배가 아프다고 했고 부친은 배 아프지 말라고 담배를 주었다 한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칡뿌리, 소나무 진 등을 먹으며 지냈지만 부친은 해방이 틀림없이 될 터이니 네가 배우지 않으면 경기 무속을 이어나갈 사람이 없다고 하시며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춤을 가르쳐 주셨다 한다.
김씨는 협률사의 일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고 조진영씨에게 춤을 배우기도 하였지만 거의가 부친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것이었다. 김씨의 나이 19세였던 해방된 해에 부녀는 산을 내려왔는데 그 후에도 2번이나 더 공부하러 갔었다고 한다.
김씨의 나이 29세 되던 해부터 충남 대전에 가서 12년간 무용학원을 운영하였다. 그때 기본 살풀이춤, 승무를 가르쳤고 가야금과 창도 가르쳤다. 그러다가 서울로 상경하였다. 박초월씨와 함께 1년 동안 학원을 운영하다가 독립하여 왕십리에서 김숙자 무용학원을 열어 북, 살풀이춤, 부채춤, 설장고, 승무 등을 가르쳤다.
김씨가 예술가로서 겪은 고생은 무척 많지만 가장 어려웠던 때는 일제시대였다. 비상시국에 일을 하지 않고 춤을 배운다고 하여 평택 보국대에 끌려가서 심한 노동을 하였다. 김숙자의 예술세계는 부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원래 김씨의 부친은 서울 성악연구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완고한 청빈성 성품 때문에 잘 어울리지 못하여 경기도 화성재인청에 계시다가 안성 신청의 악기 선생으로 발령 받아 자리를 잡고 가정을 이루었다. 그 후 김씨를 가르치고 부친이 별세할 때까지 김씨의 자문관 역할을 하였다. 김씨의 나이 35세 때 부친이 별세하였다.”
김석창은 이동백과 한 자리에서 판소리로 맞대결을 하여 훨씬 높은 평가와 사례금을 받은 적이 있을 만큼(박동진 증언) 대단한 명창이었는데 김석창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후손을 찾아 조사를 해보았는데 김석창의 후손 이산용은 김석창 명창과 그 일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1998.8.26 이산용 증언)
“이산용은 1943년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 곡천리에서 태어났고 이산용의 작은 이모가 전통춤 인간문화재 김숙자이다.
김석창 명창의 무녀독남 외아들이 김덕순이고 김석창 작고 후 김석창의 부인이 아들 김덕순을 데리고 안성의 국악인 집안 박모씨에게 재혼하였다. 이 당시 공주, 안성의 국악인들간에 교류가 활발하였다 한다.
김덕순은 모친이 재가한 후 새 집에서 구박을 받아 10대 중반에 가출하여 부친 김석창의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국악 활동을 했다.
김덕순은 어려서 부친 김석창과 김석창의 친구들에게 소리를 배웠는데 판소리 다섯바탕과 신작판소리 ‘이준 열사가’ 등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김덕순은 해금, 피리, 대금, 가야금, 거문고, 아쟁, 설장고, 꽹과리, 시조창, 재담 등도 잘했고 피리, 대금, 가야금을 직접 만들어 연주했다. 또 김덕순은 굿판에서 반주와 마달 소리도 했고 전통춤, 줄타기도 하였으며 악기로 풍류와 산조를 연주했다. 김덕순은 악기의 경우 해금과 피리를 주로 연주했는데 저녁에 혼자 집에서 해금을 2~3시간씩 자주 연주하곤 했다.
김덕순은 아명이 김덕배, 본적이 안성 곡천리이고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나 정모씨와 혼인한 후 공주에서 살다가 안성으로 다시 이주하여 살았다. 김덕순은 이산용이 중학교 3학년 때 70대 중반의 나이로 안성 불현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김덕순이 집안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라 한다. 김덕순은 점잖고 엄했으며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고 담배는 피웠다 한다.
김덕순은 딸 김숙자가 대전에서 운영하던 국악 학원에서 군산 사람 이창배에게 판소리를 5~6년간 가르쳤고 김덕순이 나성엽한테도 5~6년간 판소리를 지도했다. 이창배는 1960년경에 약 55세였다.
당시 이창배, 나성엽이 판소리를 하면 이산용이 북반주를 자주 했다 한다. 이산용은 흥보가 중 “안남산~”으로 시작되는 <제비 노정기>를 이창배, 나성엽이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고 이창배가 하는 수궁가 중 <새타령>을 목격한 바 있다 한다.
이창배는 탁성이고 키가 크고 잘 생겼고 나성엽보다 판소리 기량이 한수 위였으며 춘향가와 흥보가를 잘했다고 한다. 나성엽은 애원성이고 키가 작은 맹인이었는데 독경을 하다가 판소리로 전향한 사람이라 한다.
김덕순은 딸 김숙자의 나이 7세부터 김숙자에게 줄타기, 판소리, 전통춤을 가르쳤다. 김숙자는 부친 김덕순과 임방울에게 판소리 다섯바탕, 신작판소리 ‘이준/윤봉길 열사가’ 등을 사사했다. 또 김숙자는 대전 국악학원에서 신쾌동한테 가야금을 지도받았다.
김숙자는 1947년부터 1961년까지 대전시 중동 3번지에서 국악 학원을 하면서 가야금, 거문고, 소리북, 전통춤, 굿, 장고, 아쟁 등을 가르쳤다.
이산용의 친조모 작고 후 이산용의 모친이 친정의 부모를 모시게 되어 이산용은 13세 때 외조부 김덕순을 따라 대전 국악학원으로 이주하여 김덕순 부부, 김향자(이산용 모친), 김숙자와 함께 살았다. 당시 대전 국악학원에는 박보아, 조금앵, 신쾌동 등의 국악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한다.
김덕순은 딸 김숙자가 운영하던 대전 국악학원으로 가기 전에 안성에서 칠순 고희연을 했는데 당시 수원 삼현육각패가 합주를 하고 신쾌동이 거문고를, 박록주가 판소리를 했으며 돼지를 두 마리 잡았다 한다.
김덕순이 만든 부적 찍는 판, 점 보는 책을 현재 이산용이 소장하고 있고 김덕순이 보던 판소리 창본, 장단보도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지 이산용이 모른다고 한다.
김덕순은 진양조를 24박으로도 쳤고 6박으로도 반주했다. 그리고 김덕순은 상성이 높이 올라가고 목이 맑았다 한다.
김덕순의 부인 정모씨는 김덕순보다 5세 연하로서 16세 때 김덕순과 혼인하였으며 이산용이 중학교 1학년 때 작고하였다. 김덕순의 부인 정모씨는 시흥군 군자면 태생이고 무속 집안 출신으로서 국악인 정일동이 정모씨의 조카이고 이산용은 외할머니 정모씨가 굿 하는 것을 보았다 한다.
김덕순의 부인 정모씨 위로 오빠가 2~3명, 언니가 1명 있었다. 예전에 김덕순의 부인 정모씨가 보던 무속 단골 신도들 연락처 책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분실되고 없다 한다.
김덕순의 부인 정모씨 성음이 아주 너무너무 좋았고 김숙자가 모친 정모씨 목소리, 생김새를 많이 닮았다. 그리고 김숙자는 부친 김덕순의 성격, 예술 감각을 닮았다 한다.
김덕순의 부인 정모씨가 조동호라는 국악인의 이종 누나이고 조동호와 전통춤 인간문화재 강선영이 친척간이라 한다. 김덕순과 어울려 국악 활동을 한 사람은 이용우, 정일동, 조동호, 지갑성, 한성준 등이다.
김덕순은 슬하에 6남매를 두었는데 그 이름은 차례로 김경희(남), 김경래(남), 김향자(여), 김옥자(여), 김숙자(여), 김경식(남)이라 한다. 이들 6남매는 모두 안성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그 곳에서 살았고 이들의 후손은 현재 모두 국악을 하지 않고 있다.
김경희는 1900년대 안성군 보개면 옥천 태생으로서 1990년경에 과음으로 작고했고 전문 국악인은 아니지만 국악을 좋아해서 판소리, 가야금, 해금, 장고를 취미로 연주했으며 용인, 수원, 안성 등지의 굿판에 악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김경래는 1910년대 초반에 태어나 1980년대 초반에 작고했고 국악은 하지 않았다. 김향자는 이산용의 모친으로서 1921년에 태어나 현재 강서구 오곡동에서 살고 있으며 국악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옥자는 1925년에 태어나 현재 천안에서 살고 있으며 국악은 하지 않았다.
김경식은 1930년에 태어나 1996년에 작고하였고 국악은 하지 않았으며 현재 김경식의 부인 우홍례가 김덕순 명인의 사진을 소장하고 있다 한다.
이산용은 중학교 1~3학년 때 외조부 김덕순 명인에게 소리북, 장고를 사사했다. 당시 김덕순이 장단 도표를 만들어 장단을 지도해 주었고 이산용은 지금도 그 장단 도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김옥자의 딸 유홍난은 작은 이모인 김숙자에게 전통춤을 배웠고 그밖에도 판소리 등 국악을 했으나 1983년 겨울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유홍난은 이산용보다 4세 연하이고 양길순보다 6세 연상이며 이산용이 중학생 시절 교도소 등 위문 공연을 다닐 때 이산용은 소리북을 치고 유홍난은 판소리와 전통춤을 담당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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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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