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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은행 동영상 웹진 [신한 SOL PAY] 2023년 11월 국악음반박물관장 노재명 인터뷰 기사.
'국악의 모든 것, 국악음반박물관에 -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관장을 만나다'
모바일 링크 https://pay.shinhancard.com/pay/PAYFM005N/PAYFM005J01.shc?screenId=PAYFM301R09%7C20231112039149 (취재: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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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매거진 [브릭스 매거진](bricksmagazine.co.kr) 2023년 10월 25일 국악음반박물관장 노재명 인터뷰 내용 전문. 취재:신태진 편집자 일행.
리드문: 록과 재즈에 심취했던 고등학생이 우연히 국악 음반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충격, 감탄으로 시작된 국악 음반 및 자료 수집이 어느덧 63,000점.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누구보다 활발하게 국악 자료를 연구하고 저술 활동을 펼치는 것은 물론, 음반 제작 및 국내외 공연도 여러 차례 기획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관장입니다. 국악음반박물관의 설립 과정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 음반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 그리고 국악의 미래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노재명 관장과 나누어 보았습니다.
Q. 언제, 어떻게 국악음반박물관을 설립하게 되셨나요?
2000년도에 홈페이지를 개설하며 시작됐습니다. 당시 컴퓨터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온라인 사이트를 열었고, 그 다음해인 2001년 7월 7일 양평에 건물을 지어 정식으로 국악음반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모아 온 국악 관련 자료가 많았습니다. 보통 평생 수집을 하신 분들이 노년에 박물관을 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사후에 관리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교적 이른 3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제가 보유한 자료를 박물관으로 정리해 널리 활용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후배들에게도 배턴 터치하듯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Q. 보유하신 국악 음반을 비롯한 자료는 얼마나 되시나요? 수집하며 어려웠던 점은 없으셨나요?
개관 당시 3만 5천 점의 음반을 비롯한 국악 관련 자료를 수집한 상태였습니다. 현재는 6만 3천 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37년 넘게 수집을 하며 여러 일을 겪었지만, 다행히 주변의 반대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모님께서는 일찍이 국악에 관심을 보이던 저에게 호의적이셨습니다.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아버님께서 음악을 듣는 인생이 풍요롭고 행복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오디오도 사 주셨습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음악을 좋아하시는 애호가셨지요.
그외 어려웠던 점이라면 역시 경제적인 문제였습니다.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과다하게 음반을 사들이다보니 어려움이 닥치더라고요. 이사를 하며 작은 아파트를 판 돈으로 고가의 음반을 산 적도 있었습니다.
보관과 이전의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학생 때는 집에 보관했다가 친척분의 건물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자료실을 겸해 사용했습니다. 나중에는 옆 사무실까지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워낙 이사를 자주 하는 바람에 수많은 소장품을 일일이 옮기다보니 힘에 부친 적이 많습니다. 지금도 관절이 많이 안 좋습니다. 물리적인 짐이 인생의 짐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양평에 국악음반박물관을 개관할 때, 트럭 12대를 동원했습니다. 특히 중요한 자료는 제가 직접 몇 번에 걸쳐 승용차로 운반했고요. 그래서 분실된 작품은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약간 손상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Q. 소장품을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당시 금액으로 무려 10만 원짜리 SP 음반을 산 적 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곁에 두고 잠들었다가 잠결에 음반에 금이 가게 하고 말았습니다. 절규가 절로 나왔던 그때 얻은 교훈으로 말미암아 이후로 제가 깬 적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방송국 등의 요청으로 빌려줬다가 깨지거나 훼손된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소장품은 대여를 해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Q. LP나 카세트테이프로 된 자료가 많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디지털로 변환하는 작업도 하시고 계신가요?
네,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정말 길고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이지만 조금씩 해 나가고 있습니다. 사실 디지털 변환 작업을 하면서도 디지털 매체에 회의감은 있습니다. 저장매체의 내구성 문제, 데이터 훼손 문제로 오히려 아날로그 매체보다 영구적이지 않은 면이 있지요. 10년, 20년 단위로 새로운 디스크에 저장을 해 줘야 하니까요. 또, 디지털 신호로 쪼개져 들어가며 LP나 카세트테이프에서 들리는 느낌과 달라지기도 합니다.
Q. 1906년 송만갑 명창의 데뷔 음반이자 최초의 판소리 음반인 〈박타령〉 SP 음반이 희귀자료로 꼽힙니다. 이걸 보유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장 과정은 어떠셨나요?
미국 빅터사에서 한국에 와서 녹음한 음반입니다. 2014년 미국 마노아 하와이대학교 도서관에 송만갑 명창의 흥보가 중 〈박타령〉 SP 음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 도서관과 협약을 맺어 그 음원을 제공받아 복각한 CD와 『20세기 초반 명창 소리를 만나다』라는 책을 2016년에 만들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출간한 후 부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송만갑 명창의 바로 그 음반을 보유하고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더구나 두 장 한 세트인 음반 가운데 미국 도서관에는 한 장만 소장되어 있는데 부산에서 온 연락은 그 두 장 한 세트 음반이 미사용 상태의 완질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로 부산에 가서 몇 천만 원을 주고 그 음반들을 사 왔습니다. 이후로 경매장에 그 세트 음반 중 한 장이 또 나와서 그것도 제가 구입해 보관하고 있습니다.
Q. 음반 수집뿐만 아니라 명인, 명창과의 인터뷰도 많이 하셨습니다. 혹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할 만한 인터뷰가 있으셨나요?
국악 측면과 제 인생 측면, 두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먼저 국악 측면에서는 김영택 명인과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1998년 그분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다음 해에 그분의 음반을 기획했습니다. 인간문화재였던 김영택 명인은 그때까지도 독집 음반이 없었습니다. 마침 저의 지인이 국악 음반 제작에 투자를 하고 싶다며 의논을 하기에 김영택 명인 CD 제작에 투자하도록 권유했습니다. 김영택 명인은 황해도 출신으로 1919년생이시니 당시 여든 가까운 연세였는데, 아주 건강하고 호탕하신 분이었습니다. 유도 선수인 사위와 같이 산을 타면, 사위가 헉헉거리며 쫓아올 정도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1999년 음반을 완성해 찾아뵀을 때는 폐암으로 병환 중이셨습니다. 한국의 인간문화재는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많으십니다. 국가에서 이분들을 잘 보살펴 드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뼈만 남으신 어르신께 CD를 드렸는데, 댁에 CD 플레이어가 없었습니다. 다시 읍내에 나와 CD 플레이어를 사서 음반을 틀어 드렸지요. 그러자 명인의 눈가에 눈물이 쫙 흘렀습니다. 원래 황해도 탈춤은 피리 둘에, 해금, 대금, 북, 장고 이렇게 삼현육각이라는 합주로 맞춰 반주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악사분들도 모두 돌아가셨다 보니 그 삼현육각의 피리 연주만 음반에 들어갔습니다. 그걸 들으시면서 당신께서 젊었을 적에는 악사들이 너무 많아 줄을 서서 연주를 할 정도였는데 이렇게 피리 반주만 있으니 좀 쓸쓸하고 심심해 보인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CD를 쥐어드리고 돌아왔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길에 그분의 소리를 남길 수 있던 것은 물론, 음반을 선물해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 측면에서는 박송희 명창과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박송희 명창과 여러 번 인터뷰를 했는데, 어느 날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노부모이든 어르신이든 찾아뵐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말고 작은 선물이라도 사 가라고요. 그때가 제가 20대 후반이었는데, 그 말씀이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저희 부모님을 뵐 때나 명인, 명창분들과 인터뷰를 할 때 항상 뭐라도 사 가지고 가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또, 부모님께 때마다 용돈을 드리고 있고, 조금씩 돈을 모아 목돈을 마련해 드리려고 합니다. 거의 1억 원까지 모았던 적이 있는데, 아까 말씀드렸던 송만갑 명창의 〈박타령〉 SP 음반을 사는 데 그 돈을 전부 써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1억을 모으고 있는 상황입니다.
Q. 혹시 여러 명창과 인터뷰를 하며 미처 여쭤보지 못했던 것들,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남아 있으신가요?
판소리 인간문화재 정광수 명창이 떠오릅니다. 제가 국악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정광수 명창을 여러번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국악에 관해 잘 알지 못했고, 그분께서는 1909년생, 저는 1969년생으로 무려 60살 차이가 나다 보니 말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언어적인 갭이 있어서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도 있고요. 세월이 지나 저도 중년의 나이가 되니까 그때 용기 있게, 자신 있게 구체적으로 물어볼 걸, 안타까움이 남았습니다.
정광수 명창은 김창환이라는 아주 옛날 명창의 제자셨습니다. 그런데 이 김창환 명창에 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김창환 명창께는 제자가 여럿 있었는데, 그 수십 명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 있습니다. 동문인 정광수 명창이 다 알 만한 분들이었으나 그 사진을 맨날 보면서도 그분께 여쭤볼 생각을 못했습니다. 나중에 논문을 쓸 때 그 사진에 계신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수많은 자료와 비교하며 찾느라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Q. 말씀하신 것처럼 자료를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고고학적 자료를 연구‧분석까지 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대학 교수, 학자, 국악인들은 다 본인만의 전문 분야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악기 연주를 잘하고, 어떤 학자는 악보만 연구하시지요. 후학을 가르치시는 데 집중하시는 교수들도 있고요.
저는 오랫동안 국악 자료를 모으다 보니 그걸 연구하고 분석하는 데 특화된 것 같습니다. 그에 따른 성취감도 있지만, 제 임무, 맡은 역할을 해나간다는 의무감에 더 가깝습니다. 국악이라는 집이 있다면, 그 기둥 한 축을 제가 담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기둥 하나라도 빠지면 집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마음, 어떻게 해서라도 이 기둥을 지탱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디서 누군가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겠지 하며 막연히 안심하기도 했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내가 해온 일을 의외로 하는 이가 극히 적다는 걸 느끼게 되었고 그때부터 남에게 미룰 일이 아니라 그냥 내가 해야만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 나만 아는 역사도 있고 내가 무너지면 안되겠다는 다짐이 생겼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놀지 않고 그래도 열심히, 좋아서 이 일을 해 왔구나 하는 뿌듯함이 느껴질 때도 있고요. 그래서 건강 관리도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금주도 하고, 금연도 했지요.
예전에는 사료 발굴, 조사를 거의 주로 혼자서 했지만, 이제는 후배들이나 동료들에게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다 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각 지역에 사는 분들에게 연구를 권유하면 더 효과적이고 용이하기도 해서요.
민속음악에 관한 살아있는 연구를 위해서는 앉아서 책만 봐서는 안 됩니다. 직접 현장에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발로 뛰어야 하지요. 제가 겪은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책에서 제주도 무속음악을 잘 하는 심방(무당)이 아무개 씨라고 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실제는 어떤지 현장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한 달 동안 가족과 함께 차로 제주 골목골목을 다니며 마을 사람들에게 어느 심방께서 무속음악을 잘 하시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전 책에 나왔던 내용과 사뭇 달리 제주 현지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중춘(1932~2011) 명인을 제주 무속의 최고 실력가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이러한 조사 보고서를 1999년 학계에 발표하였고 이후 이중춘 명인이 기존 영감놀이 예능보유자(1986년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2호 지정)에 이어 2001년 추가로 제주 큰굿(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3호)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이중춘 명인 사후 2021년에는 이중춘 명인이 전수한 제주 큰굿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승격되었습니다.
Q. 말씀을 들으니 굉장한 행동파이신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돌적인 면이 있긴 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국악 자료뿐만 아니라 명인, 명창을 만나러 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부고 기사가 많이 실렸는데요, 80년대에 인간문화재 정권진 명창이 돌아가셨다, 인간문화재 김명환 명고수가 돌아가셨다 매일같이 기사가 나오는 겁니다. 아, 이렇게 자료 수집만 할 게 아니라 이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직접 만나야겠다, 그래서 인터뷰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연세 많은 명인들께서 어린 학생이 찾아오면 적적하던 차에 기특하고 반갑기도 하지만 당혹스럽기도 하시지요. 그래서 제가 만날 명창의 스승되시는 분의 사진이나 그분께 없을 만한 음반의 녹음본을 가져가서 문전박대를 당할 것 같으면 비장의 카드로 꺼내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아주 좋아하시고 환영해 주셨지요. 가난한 학생이라 녹음기도 없을 때라 그냥 인사드리고 사인만 받거나 악수만 하고 나올 때도 많았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시작해 지금까지 800명 정도 인터뷰를 해 왔습니다.
서도민요 명창을 만난 기억도 떠오릅니다. 그분의 손가락 한 군데에 녹색 점 문신이 있으셨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이 기생 권번 출신이신데, 동기들이 나중에 나이 들면 서로 못 알아볼 것 같아서 문신을 남기셨다고 하더군요.
Q. 김영택 명인의 음반처럼 국악 음반 제작에도 여러 번 참여하셨지요?
1991년부터 음반 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스물다섯에 음반회사에 국악 담당자로 취직을 했습니다. 국악에 심취해 1.98이라는 점수로 건축학과를 졸업한 상황이었는데, 서울음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일본에서 국악 SP 원반이 대량 수입됐는데 이걸 고증해서 LP, CD로 복각하여 만드는 기획을 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제가 이력서를 써 낸 것도 아니고 먼저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해 달라고 특채로 연락이 온 셈이니 구름을 타고 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LP, CD를 다 만들고 나니 1995년에는 LG그룹에서도 비슷하게 일본에서 대량 수입된 SP 음원을 고증해 CD 전집으로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무려 100장짜리 CD 전집이었고, 제가 99% 이상 고증을 했습니다.
LG그룹과의 음반 제작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김차돈이라는 분이 1934년 10세에 녹음한 음원이 있었는데, 학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고증 과정에서 수소문 끝에 이분이 중고제 판소리 대가 김창룡 명창의 손녀라는 사실을 SP 복각 음반과 함께 학계에 처음 발표하였습니다. 그후 1999년 일본 오사카에 살고 계시는 김차돈 명창과 극적으로 연락이 닿아 감격스러운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음반을 제작하면서 그 분의 10세 때 녹음을 마르고 닳도록 듣다가 갑자기 76세가 된 동일한 분의 연로한 목소리를 접하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자가 된 듯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인생무상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Q. 여러 논문도 집필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논문이 첫 논문이었던 〈판소리 명창 이선유의 음반에 관한 연구〉라고 하셨습니다. 이선유 명창을 논문 주제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어떻게 하다 보니 이선유 명창과 그런 인연이 되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이선유 명창의 음반이 많이 구해졌고, 마침 이분에 관한 논문도 거의 없어서 주제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상도는 판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이선유 명창은 특이하게도 경상도 출신입니다. 이분은 동편제에서도 아주 옛날식의 판소리를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판소리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분이었지요. 옛날 판소리는 지금과 다르게 고풍스럽고 또 담백합니다. 기교적이거나 양념이 많이 가미된 느낌이 아니에요. 물 흐르듯이, 말하듯이 굉장히 자연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전혀 안 들이고 소리를 하시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요. 사실 힘을 안 들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오랜 수련으로 단전에 내공이 단단하게 쌓인 힘을 발휘하는 것인데, 듣는 사람은 편안하고 그래서 어떤 미묘한 신비감마저도 느껴집니다.
이런 명창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습니다. 예전에는 신분도 낮게 취급당했기 때문에 어디에서 누가 노래를 하라고 하면 어떤 악조건에서도 소리를 내셨습니다. 감기에 걸렸거나, 술에 취했거나 상관없이요. 그래서 더욱 초월한 듯한 소리를 내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우즈베키스탄, 조지아, 중국, 일본, 네팔 등 동서양 여러 나라의 민속음악도 연구해 오셨습니다. 국악과 연관성 측면에서 놀랍거나 의외였던 국가는 어느 곳인가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입니다. 이와 관련해 『코카서스산맥 민속음악 여행』이라는 책을 내고 그곳에서 〈한국-실크로드 국제아리랑축제〉도 열었습니다.
학생 때부터 고구려 무용총에 그려진 춤을 눈여겨 봤습니다. 왜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팔을 뒤로 하는 춤을 췄을까 궁금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영상에서 조지아의 민속춤 <심디>가 고구려 무용총의 춤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신기해서 조사를 하다 보니 조지아에 〈아리랑〉을 닮은 노래도 있었습니다.
그 길로 인터넷에서 조지아의 음악가로 추정되는 사람 사진 한 장을 찾아 인화하여 들고 무작정 조지아 트빌리시 공항에 내렸습니다. 그때가 2012년이었는데, 딱히 의지할 곳 없이 육감으로만 현지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조지아는 ‘와인의 시초’로 불릴 만큼 와인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유사 이래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이 춤과 노래 등 풍류가 발전하기 마련이었지요. 그래서 조지아에서도 포도밭이 많은 데로 가야겠다, 거기 가면 음악가도 많을 것 같다는 추론을 했습니다.
모바일 지도도 없이 물어물어 조지아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 카헤티(카케티)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혹시나 해서 기사에게 조지아 음악가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버스기사가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겁니다. 유명한 분 같았습니다. 어디 사는지도 안다고, 가까운 곳에 저를 내려주더군요. 동네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자 길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찾던 사진 속 음악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조지아 민속춤과 노래에 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왜 팔을 뒤로 빼며 가슴을 내미는 춤을 추었을까. 예부터 코카서스가 싸움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자연스레 호전적인 민족이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춤 자체가 무술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슴을 내밀어 몸을 키우면서 용기 있고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상대를 압도하려던 것입니다. 그건 역시 많은 전쟁을 겪었던 고구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제가 <아리랑>도 불러주니 그 음악가가 조지아의 비슷한 노래도 불러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분을 통해 조지아의 무용가, 악기 제조가 등 여러 사람을 만났습니다. 조지아 다음으로는 아르메니아로 넘어가 조사를 계속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자장가>, <농부가>도 <아리랑>과 아주 흡사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국과 코카서스의 민속춤, 음악의 연관성을 밝혀냈고, 그곳에서 국제아리랑축제도 열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담아 낸 책이 『코카서스산맥 민속음악 여행』이었고요. 거꾸로 코카서스 지역의 음악가를 초빙해 한국에서 세종국제실크로드음악제를 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와 그 먼 땅에 비슷한 춤, 음악이 남아 있었을까요. 한국과 코카서스 지역은 실크로드의 끝과 끝이었습니다. 마치 양쪽 주머니처럼요.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되던 문화가 왼쪽 주머니와 오른쪽 주머니에 모이게 된 것이 아닐까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리랑>의 어원은 아르메니아에서 온 게 아닐까 합니다. 아르메니아와 터키 국경에 아라라트, 혹은 아라랏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의 끝에 도착한 곳으로 묘사되는, 굉장히 신성시되는 곳입니다. 이 산간지대에는 아라랏의 고어인 <오로르>라는 자장가가 있는데, 이 자장가가 한국의 <아리랑>과 흡사합니다. <아리랑>의 고형 어원이 아라리이고 그 아라리가 오로르, 아라랏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산간지대인 정선에서 <아리랑>이 성행한 것도 아르메니아 산간 일대에서 불린 〈오로르〉, <농부가>와 관련이 있다고 보입니다.
Q. 요즘 국악과 현대음악 혹은 대중음악의 크로스오버가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둘 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비중이 더 크다의 문제가 아니라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정통 국악은 이를테면 장독에 숙성된 김장김치 같은 것이고, 퓨전은 시중에서 편하게 사 먹을 수 있는 포장김치, 꼬마김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장독에 든 김장김치는 꺼내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뒷마당 장독대로 나가 김치를 꺼내고, 자르고, 많은 절차가 필요하지만 숙성된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요. 반대로 꼬마김치는 언제든 쉽게 사고 배송도 빨라 편의성이나 접근성이 좋지만 깊은 맛은 떨어지는 것입니다.
국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 불편함과 접근성 때문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판소리 완창을 듣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리니 마음의 여유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퓨전 국악을 통해 조금씩 귀가 뚫리고 오리지널을 들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과정으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국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환경도 중요합니다. 전통적인 인테리어의 한옥에서 한복도 갖춰 입고 녹음된 소리가 아닌 소리꾼이 현장에서 내는 생생한 목청을 들어야 그 감동이 배가 됩니다. 마치 오래 묵힌 김장김치를 좋은 그릇에 좋은 음식과 함께 내면 더 맛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Q. 앞으로 우리가 국악을 보존하고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어떤 정책이나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좋은 정책과 막대한 지원이 있어도 대중의 관심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비용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배는 산으로 가게 되지요. 대중의 관심을 제고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국악을 접할 기회가 많으면 관심은 물론 국악을 해야겠다는 소망이 생기고, 모두가 기본적인 지식도 갖추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게 되기 때문에 국악의 미래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도 막을 수 있고요. 교육과 함께 공중파나 신문, 혹은 요즘 부상한 인터넷 매체에서 국악을 많이 다루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방송 프로그램의 몇 퍼센트는 국악을 의무적으로 다루게 한다든가, 전철이나 버스, 횡단보도에서 흐르는 음악에 판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차용한다든가, 교육에서도 외국 음악과 국악의 비중을 최소한 50:50으로 똑같이 한다든가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판소리를 접했는데 그전까지 자주 접하던 음악 언어가 아니다 보니 쉽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종일 판소리를 틀어놓고 몸에 스미게끔 했습니다. 영어 공부하듯이 판소리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귀가 열리게 되었고요. 모든 음악 교육이 그렇듯, 국악 교육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 혹은 계획은 무엇인가요?
국악을 세계적으로 알리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대중가요, 소설, 영화가 외국에서 인기를 끌고 상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악은 외국에서 인정해 줄 수 있는 콩쿠르 같은 것이 없습니다. 거의 한국에서만 대회가 열리고, 따라서 여러 문제도 발생하고는 합니다. 저는 국악을 국제적으로 공인 받고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연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학교가 전 세계로 진출해 한글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루트를 활용해 국악을 알리는 것입니다. 오직 칠판에 글자만 써서 한글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판소리로 부른다든지 하는 식으로 음악적인 요소를 가미하면 훨씬 생동감 있고 배우는 사람도 더 재미있을 거라고 봐요.
제가 국제판소리축제를 많이 기획하고 연출했는데, 국악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판소리 공연이 전석 매진이 될 정도로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은 퓨전이 아니라 정통 국악, 오리지널을 더 선호합니다. 흔히 외국에서 판소리 공연을 한다고 하면 “고리티분해서 듣겠어? 퓨전으로 공연해!” 하는 말씀들도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완창에 네~다섯 시간이 걸리는 판소리를 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집중해서 듣습니다. <승무>, <살풀이> 같은 춤을 보면 “저게 전통이라고? 오히려 전위적이다, 아방가르드하다” 생각하기까지 하고요. 시간이 오래 걸려도 찬찬히, 낯선 문화라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태도를 어려서부터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국제적인 루트가 열리면 판소리를 테마로 하는 심도 깊은 관광, 교육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에는 한옥이 거의 없으니 국내의 한옥에서 판소리 공연을 보게 하고 거기에 판소리 학습, 관련 체험까지 함께 커리큘럼으로 넣을 수 있을 것이고요. 가능한 국내외에 국제 판소리 학교 등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이렇듯 앞으로도 우리 전통 음악이 국제적인 위상을 얻고 지구촌의 많은 분들이 그 진면목을 깊게 알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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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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